1983년 7월 22일 전두환 대통령은 청와대 집무실에서 '국가기간전산망 계획'을 보고받았다.
이 자리에는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 김재익 경제수석, 홍성원 과학기술비서관 등이 참석했다. 보고는 전자공학박사인 홍성원 비서관이 했다.
보고 내용은 간명했다.
첫째 국내 모든 전산망 체계는 국방망·정보망·행정망을 포함한 국가기간전산망을 중심으로 구성, 연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국가기간전산망 기본계획은 1983년 말까지 작성하며, 이는 정보산업육성위원회가 주관한다.
둘째 중요한 전산화 계획은 국가기간전산망 계획에 부합하도록 합리화 방안을 추진한다.
셋째 성공적인 국가기간전산망 수행을 위해 컴퓨터 단말기 보급, 네트워크와 데이터베이스(DB) 구축, 인력 양성과 사용자 대상 교육이 필요하다 등이었다.
이 같은 청와대 계획은 미래를 내다본 정보화 청사진이었다.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은 그때까지 미지의 영역이었다. 추진한 사례가 없었다.
그해 5월 출범한 정보산업육성위원회는 청와대 비서실장이 위원장이었다. 과학기술처·체신부·상공부·총무처 등 관련 부처 차관, 대통령 비서실 수석비서관, 관계 전문가 등 10여명이 위원이었다. 이런 가운데 전산망 사업을 정보산업육성위원회가 주관키로 한 만큼 이 사업의 성공 키는 청와대가 쥐고 있었다.
전 대통령은 보고가 끝나자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이 계획은 대통령이 추진하는 사업으로 생각하고 적극 추진하시오.”
정보화를 향한 전산망 사업이 첫발을 내디디는 순간이었다. 대통령 지시에 따라 위원회는 관련 기관과 수시로 사업 내용을 협의하고 조정하면서 세부 추진계획을 마련했다. 실무는 청와대 경제비서관실이 담당했다.
홍성원 당시 과학기술비서관의 생전 증언. “전두환 대통령은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이 각별했습니다. 당시 비서관이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는 일은 드물었습니다. 전 대통령에게 '전산망은 행정 쇄신과 정보산업 육성이라는 점에서 추진해야 한다'고 보고했더니 즉시 수용하셨습니다. 구체적인 추진 계획을 수립하기까지 관계 기관과 협의하고 조정하는 등 여러 과정을 거쳤습니다.”
정보산업육성위원회는 1차로 그해 9월부터 10월 20일까지 국가기간전산망 구성과 운영에 대한 각계의 의견을 수렴했다. 구체적인 전산망 구성과 운영 방안을 수립하기 위한 조치였다.
설문 대상은 전국 230개 공공기관과 70명의 관계 전문가들이었다. 국내 모든 전산 관련 기관을 망라했다. 이들에게는 함병춘 정보산업육성위원회 위원장 명의의 설문지를 발송했다.
당시 청와대 행정관 J씨의 말. “이 사업은 현재 인터넷과 유사한 개념으로, 당시에는 혁신적인 개념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일부 전산 전문가와 실무자들은 이 개념에 회의를 나타냈고, 사업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습니다.”
당시 육성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1983년 한 해 정부 부처와 출연기관이 지급하는 컴퓨터 임차료는 170억여원이었다. 14개 은행은 총 430여억원. 이 두 곳만 해도 600억원이 넘었다. 이들 외 정부투자기관이나 민간기업을 합치면 최소한 1000억원을 컴퓨터 임차료로 외국에 지불했다. 엄청난 국부 유출이었다. 이는 한국과학기술원 부설 전산개발센터 같은 곳을 50개 이상 운영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당시 정부는 전국적인 전산망을 구성하지 못했다.
함병춘 당시 육성위원장은 '각계 의견 청취 계획'이라는 문서에서 이렇게 당부했다. “정부는 공공기관 전산화에 대해 국가기간전산망(가칭)을 구성, 운영하는 방안을 현재 검토하고 있습니다. 이 방안은 관련 기관과 정보산업 발전에 미칠 영향이 방대하므로 관계 당사자들의 이해와 협력 없이는 실현할 수 없습니다. 귀하와 귀 기관의 충분한 의견과 대안을 듣고 정책에 반영하고자 합니다. 정보산업 육성과 공공기관 전산화 촉진을 위해 고견을 문서로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청와대 경제비서실이 1983년 7월 22일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한 '국가기간전산망 계획' 보고서.
위원회가 제안한 전산망 사업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공공기관 전산망은 업무 관련성과 전산화 실태, 앞으로 발전 전망 등을 감안해 5개 망으로 합리화한다. 5개 망은 △행정망(정부 부처청과 지방 행정기관, 공공기관) △금융망(은행, 농협, 우체국) △교육 연구망(대학교, 연구소 등) △국방망(국방부, 병무청, 각 군 등) △공안망(안전기획부, 치안본부, 검찰 등)으로 한다.
둘째 전산망 구축은 1984년 착수, 1985년 말 완료한다.
셋째 행정망은 체신부 장관, 금융망은 재무부 장관, 교육 연구망은 과학기술처 장관, 국방망은 국방부 장관, 공안망은 안전기획부장을 각각 책임자로 한다.
육성위원회가 각계에 보낸 설문지를 받아서 분석한 결과 전체 응답자의 95%가 한목소리로 전산망 구축에 적극 찬성했다. 나머지 5%도 사업 추진에 찬성하지만 단계적 추진을 건의했다.
전두환 대통령 회고. “내가 취임한 직후부터 청와대 경제비서실이 정보화 시대를 내다보며 의욕적으로 추진한 전략 사업 중 하나가 국가기간전산망을 구축하는 일이었다. 국가기간전산망이라는 개념을 정립한 시기는 1983년 9월쯤이었다. 그해 12월 청와대 비서실장이 위원장을 맡고 있던 정보산업육성위원회로부터 이 계획의 중간보고를 받고 승인했다. 이 계획은 컴퓨터수요를 창출하고 정보산업을 체계적으로 육성하며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정부를 구현하다는 목표 아래 추진한 사업이다. 이 계획은 부처별, 기관별로 추진하고 운영하던 전산화 사업을 행정망과 금융망, 교육연구망, 국방망, 공안망 등 5대 기간전산망으로 통합 운영키로 한 것이다. 정부는 국가기간전산망 구성과 운영에 사용할 기본 시스템인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국산화하고 통신 네트워크도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정보고속도로 개념으로 건설한다는 방침을 정했다.”(전두환 회고록)
그해 12월. 정보산업육성위원회는 전두환 대통령에게 '국가기간전산망 계획(안)' 중간 보고를 했다. 각계의 의견을 수렴한 좀 더 구체화된 계획안이었다.
보고 내용은 국가기간전산망 구성과 운영계획, 정보산업 육성위원회 운영 강화와 관련 정부 기능 활성화 등이었다. 이 역시 홍성원 과학기술비서관이 보고했다.
보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공기관 전산망을 5개 기간전산망으로 구축해 국내 정보산업을 육성하고 국가 전체 투자 효과를 극대화한다. 이를 위해 국가정보체계를 표준화하고 국가 정보자료 수집과 분석, 전달체계를 확립하며 작고 효율적인 정부를 실현한다.
△행정망 책임 추진기관은 한국데이터통신으로 한다. 신규사업은 위원회가 처음부터 주도하고 기존 사업은 순차 흡수한다. 금융망은 금융전산전담회사를 신설해 책임기관으로 지정한다. 교육 연구망은 한국과학기술원 전산개발센터가 책임을 맡아 전산망을 구축한다. 이를 위해 인력양성과 투자를 대폭 확대한다. 국방망은 국방부가 책임기관으로 추진하며, 국방부와 각 군 및 관련 기관 인력·예산을 흡수해 통합 운영한다. 공안망은 관계기관 협의기구에서 추진한다.
△정보산업육성위원회 운영을 강화하고, 정부 기능도 활성화한다. 위원회에 국가기간전산망 구성과 운영 지원, 망별 추진상황을 확인하고 독려하는 임무를 추가한다. 망별 추진책임기관은 위원회에 추진상황을 보고해야 한다.
△공공기관 컴퓨터 도입 허가 절차를 간소화한다. 국가기간전산망 소속기관 컴퓨터 도입 여부는 망별 추진책임기관이 결정한다. 과학기술처, 총무처, 상공부 등에 분산해 있던 공공기관 컴퓨터 조정 업무는 정보산업육성위원회가 일괄 처리한다.(당시 과학기술처는 '전자계산조직위원회', 상공부는 '전자계산조직 수입계획심의위원회', 총무처는 '행정전산화 추진위원회' 등을 통해 행정기관 컴퓨터 도입이나 수입을 심의하고 승인했다)
△행정망, 금융망, 교육연구망은 망별 추진책임기관 주관 아래 1984년 3월 말까지 과학기술처 특정연구사업으로 관련 세부 작업을 완료한다. 국방망, 공안망은 국방부와 협의기구에서 자체 안을 작성하고 1984년에 시행한다.
당시 청와대 행정관이던 정홍식 전 정보통신부 차관의 증언. “당시 컴퓨터 도입 종합심의 목적은 컴퓨터 국산화를 촉진한다는 점과 컴퓨터 공동이용을 확대해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을 촉진한다는 데 있었다. 이때부터 모든 공공기관은 업무용 컴퓨터 도입 시 가능한 국산 컴퓨터를 사용하도록 권장했다. 불가피할 경우는 컴퓨터를 도입하되 앞으로 국가기간전산망을 완료하는 대로 전산망에 통합한다는 조건부로 도입을 승인했다.”(한국IT정책 20년)
이 사업은 국가 정보화의 새 지평을 여는 일이었다. 육성위원회는 갈 길 바쁜 다음 단계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