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기고] 첨단기술 경쟁력, 글로벌 기술협력으로부터

신희동 한국전자기술연구원(KETI) 원장
신희동 한국전자기술연구원(KETI) 원장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업체 ASML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7㎚ 이하 초미세 반도체 공정 구현에 필요한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제조할 수 있는 기업이다. 20년 전만 해도 세계 반도체 노광장비 시장은 ASML, 캐논, 니콘이 삼분했다. EUV를 개발한 ASML은 현재 시장 수요 90%를 차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을 지배하는 '슈퍼 을(乙)'이 됐다.

이 같은 성공의 이면에는 뚝심의 세월이 있었다. 경쟁사였던 캐논과 니콘은 막대한 투자비용과 기술적 한계로 EUV 장비 개발을 일찌감치 포기했다. 하지만, ASML은 1997년 첫 EUV 연구에 착수한 이후 22년 만인 2019년 삼성전자를 통해 EUV 기반 7나노 반도체 제품을 양산하는 데 성공했다.

ASML의 성공 비결은 하나 더 있다. '국제협력'이다. EUV 노광장비를 개발·생산하기 위해 900개사에 달하는 글로벌 협력 생태계를 갖췄다. 벨기에 IMEC(공동 연구·개발), 독일 칼자이스(반사거울 제작), 일본 미쓰이(펠리클 제조) 등이 대표 사례다.

또, 적극적인 해외 기업 인수·합병(M&A)으로 개방형 혁신은 물론 미국·유럽·아시아 거점별 R&D 센터를 구축해 EUV 장비 성능개선과 글로벌 인재 확보·육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국제협력이 혁신의 주요 철학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지금은 한 국가가 특정 분야에서 모든 기술주권을 독자적으로 확보하기 어려운 시대다. 예컨대 미국은 반도체 분야에서 설계, 장비 등과 관련한 원천기술이 갖고 있다. 하지만 생산기술은 한국과 대만, 소재·부품기술은 일본의 도움이 필요하다. 미국이 최근 '칩(CHIP)4' 동맹을 결성한 취지다. CHIP4는 협력적 기술주권 개념을 부각한 상징적 사례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출범 이후 약 20년간 지속된 자유무역 기조는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자국·우방국 중심의 제한적 협력으로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우방국간 국제협력도 세계 무역질서에 따라 변화를 피할 수 없다.

지난 4월 대통령 미국 순방에 동행해 한·미 간 국제협력의 다양한 성과를 목도했다. 반도체·배터리·바이오·자율주행·항공·로봇·청정에너지 등에서 양국 기업과 연구소, 공공기관이 공동연구, 인력교류, 제품개발, 인증·표준 관련 기술협력 강화에 뜻을 모았다. 이는 협력적 기술주권을 확보해 글로벌 공급망 안정에 크게 이바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세계경제 블록화는 단순한 동향을 넘어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따를 수밖에 없는 생존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따라서 첨단기술 분야 국제 공동 R&D 확대, 현지 공급망 기술협력 센터 설립 등 우리나라 정부의 국제협력 강화를 위한 노력은 시의적절한 조치로 풀이된다.

글로벌 기술 리더십을 확보하고 첨단기술·산업 분야에서 강화된 정부의 국제협력 기조를 반영한 R&D 정책의 새판짜기가 중요한 분기점을 지나고 있다.

국제협력은 우리나라 기업의 글로벌화를 위한 기회의 창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자기술연구원(KETI)도 창립 이래 51개국 170개 이상 기업·기관과 글로벌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모빌리티, 인공지능, 에너지·환경, 스마트제조 등의 첨단산업에서 국제 R&D 협력으로 새로운 기술 프론티어를 개척하고 있다. 이 같은 노력은 협력적 기술주권 확보에 이바지할 것이다. 그동안 축적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국내외 기업간 협력수요 발굴·매칭으로 한국 기업의 해외시장 진출을 돕는 긍정적인 효과를 얻었다.

KETI는 산업통상자원부가 추진하는 산업기술국제협력사업, 현지 R&D 센터 설립 등에 적극 참여할 계획이다. 무역질서 변화로 인한 생존위기를 정부와 함께 극복하고, 우리나라 중소·중견 기업이 글로벌 공급망에서 시장지배력을 높일 수 있도록 지원할 방침이다. 협력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기 때문이다.

신희동 한국전자기술연구원(KETI) 원장 shinhd@ket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