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년간 기업의 관심은 미중간 갈등으로 촉발된 기술 자국 우선주의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에 쏠려있다. 글로벌 분업체계에서 수출로 성장한 우리 기업에게 세계경제 블록화는 새로운 도전과제다.
더구나 지금은 새로운 산업이 빠르게 성장, 기존 산업을 대체하는 격동의 시기다. 대기업은 탄탄한 공급망을 갖추고 시장을 선점하는 데 집중해야 하고, 중소기업은 새로운 산업구조를 따라잡을 수 있는 기술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만약 이 흐름에 올라타지 못하면, 새로운 경제질서에서 밀려나고 말 것이다.
이런 현실 인식 아래 기업들은 신기술 확보를 위해 전력질주하고 있다. 자동차 부품을 만들던 기업이 디지털헬스케어 기술을 개발하는가 하면, 철강회사가 수소 기술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기업인들은 연구개발(R&D)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그러나 기업의 노력만으로는 역부족이다. 특히 연구원 5명 내외의 작은 연구조직을 가진 중소기업이 각자의 힘 만으로 글로벌 기업과 경쟁하는 것은 힘겨운 일이다. 기업들은 대학이나 공공연구기관과의 협력을 절실히 바라고 있다. 공공의 높은 연구역량과 산업계의 사업화 역량이 효과적으로 연결되는 강한 생태계 구축을 염원하는 것이다.
실제 경제강국들은 이같은 산학연 R&D협력 생태계가 잘 갖춰져 있다. 세계 히든챔피언 기업 절반을 보유한 독일에선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인 프라운호퍼와 기업간 협력이 돋보인다. 전국 곳곳에 위치한 76개 지역 연구소가 기업들과 연계해 산업과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응용기술을 개발한다.
일본 이화학연구소는 3명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해낸 대표적인 자연과학 종합연구소지만, 2019년 기술이전을 전담하는 외부법인을 설립하고 기업과의 협력에 적극 나서고 있다. 하버드대와 메사추세츠공대(MIT), 스탠퍼드대 등 유수 대학들이 미국의 강력한 기술벤처와 스타트업의 산실이 돼온 것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처럼 선진국의 산업경쟁력 기저에는 튼튼한 과학기술과 건강한 산학연 생태계가 떠받치고 있다. 우리에게도 25개 출연연과 전국 335개 대학이 있다. 지난 50여년 지속적 R&D투자를 통해 가꿔온 소중한 자산이다. 이제는 투자의 결실을 거둘 때다. 어렵게 만들어낸 연구성과가 기업에서 새로운 상품으로 태어난다면 그보다 멋진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런 건강한 생태계를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다. 기업과 대학, 출연연이 소통하고 신뢰를 쌓는 것이 먼저다. 이 과정에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와 전국연구소장협의회 같은 조직이 소통창구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 의견을 대학과 출연연에 전달하고, R&D계획에 반영하는 체계를 만들어보자. 또, 정부 R&D 개편을 계기로 출연연과 대학이 좀 더 기업에게 다가오기를 바란다. 이는 새로운 한국형 R&D 생태계 첫걸음이 될 것이다. 이렇게 첫 발을 떼면 자연스레 협력방식도 전문화할 것이다.
과학기술은 대한민국이 성장해온 비결이자, 미래라고 믿는다. 비록 현재 우리가 처한 환경이 좋지 않지만, 언제나 그랬듯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낼 것이다. 지금은 함께 힘을 모아 위기 속에서 기회를 찾아낼 때다. 똑똑한 R&D협력 생태계 구축이 그 방법이다.
김민수 전국연구소장협의회장(티엠바이오 대표) ksilb@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