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초년 시절 중소기업 분야를 취재했을 때 대금 정산 문제를 접한 적이 있었다. 비교적 많은 제조 기업이 대금 정산 지연으로 인해 운영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내용이었다.
제조업 특성 상 하청에 재하청을 반복하는 피라미드 구조는 대금 정산 문제에 매우 취약하다. 꼭대기 원청 기업의 대금 지급이 한 주만 미뤄져도 최하단에 위치한 소기업의 대금 정산은 수개월씩 밀린다. 경기가 나빠질 수록 정산 기간은 늘어지고 최악의 경우 기술력을 갖춘 소기업일지라도 쉽게 주저앉는다.
유통업계에도 대금 정산 문제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e커머스 업체의 정산 기간이 너무 길어 셀러가 자금 융통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 골자다. 대부분 소상공인으로 이뤄진 셀러에게 대금 정산은 기존 유통 체계를 유지하고 새로운 장사를 시도하는 밑천이다. 여러 단계를 거치는 제조업과는 차이가 있지만 대금 정산 문제 만으로 사업체 운영에 압박을 받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대규모유통업법 8조에 따르면 대규모유통업자는 판매 대금을 월 판매 마감일로부터 40일 이내에 납품업자에게 지급해야 한다. 직매입 거래는 상품 수령일로부터 60일 이내에 대금을 지급해야 한다. 대금 지급 기한이 초과될 경우 연 15.5%에 해당하는 지연 이율도 지급하도록 명시돼있다.
e커머스마다 정산 주기는 제각각이다. 구매 확정일 다음날 정산을 확정하는 플랫폼이 있는가 하면 최대 60일까지 주어진 기한을 채워 지급하는 경우도 있다. 플랫폼별로 선정산 서비스를 운영하지만 요건이 매우 까다롭다. 그나마 정해진 정산 주기도 오락가락하는 경우가 많다. 시스템 상 오류, 정산 체계 변경 등 이유는 다양하다.
셀러 입장에서 물품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구매부터 해야 한다. 판매 대금이 들어오지 못하면 약속한 구매 대금 지불에 어려움을 겪는다. 결국 대금 정산이 하루만 밀려도 돈을 빌리는 셀러가 생긴다.
더불어민주당 김종민 의원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9년부터 올해 8월까지 플랫폼 입점업체가 대금 정산을 대출로 먼저 받은 건수는 약 1만3000건이다. 대출 규모로는 1조8130억원에 달한다. 대출 규모는 매년 늘어나 지난해 6240억원까지 늘어났다. 대금 정산이 늦다는 이유 만으로 평균 4%대 이자를 감당하는 셀러가 늘고 있다.
해외 플랫폼의 경우 현행법 적용도 받지 않는다. 또 판매·정산 시점에 따라 환율 변동 위험까지 존재한다. 실제로 글로벌 모 플랫폼은 정산 주기를 일주일에서 한 달로 늘린 이후 끊임없이 셀러의 불만을 사고 있다. K상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음에도 셀러는 역직구 판매를 망설이게 된다.
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은 국정감사 자리에서 최대 60일 이내로 규정된 대금 정산 기한을 줄여야 한다는 지적에 공감했다. 그는 자율 규제로 문제 해결에 노력하고 필요할 경우 제도적 조치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e커머스 시장에서 셀러 경쟁력은 플랫폼 경쟁력으로 직결된다. 대금 정산 문제는 어떤 셀러에게는 생존에 가까운 문제로 작용하기도 한다. 대금 정산 주기를 현실화하고 셀러 경쟁력을 키우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민경하 기자 maxkh@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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