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대표적 실학자이자 정약용의 형으로 알려진 정약전은 신유박해(辛酉迫害)에 연루되면서 결국 흑산도에서 유배 생활을 겪게 되었다. 정약전은 힘든 유배 생활에도 학자적 면모를 발휘해 여러 저술을 남겼다.
그의 저술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자산어보'다. 자산어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 생물 백과사전이다. 정약전은 일명 '창대(昌大)'라고 불리는 어부 장덕순과 흑산도 근해의 토종 어류, 갑각류, 어패류 등을 조사해 책에 기록했는 데, 그 폭과 깊이는 전례없는 것이었다.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고려하면 일반적으로 진솔한 교류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지는 두 사람이 오직 애민정신과 탐구심으로 뭉쳐 자산어보라는 걸작을 빚어냈다는 사실이다.
최근 격동하는 자동차 산업을 바라보자면 마치 미지의 바다 속을 탐험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친환경차, 자율주행차, 소프트웨어 중심 자동차(SDV, Software Defined Vehicle) 등으로 명명된 거대한 변화 속에서, 우리가 알지 못했던 기업들이 새로운 산업 생태계의 일원으로 거듭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미래차라는 바다에는 신생 기업과 성숙 기업, 큰 기업과 작은 기업, 하드웨어(HW) 기업과 소프트웨어(SW) 기업, 제품 기업과 공정 기업이 공존한다. 그리고 이제 이들은 각기 고유한 특성을 지켜나가는 한편 변화의 물결을 받아내며 풍요롭고도 강건한 산업 생태계를 이뤄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이 어떻게 서로간에 교류와 협력을 도모하고 지속하는 가이다. 하나의 같은 산업 생태계라는 이상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녹록지 않다.
예컨대 규모가 큰 성숙 기업은 풍부한 자금과 네트워크로 다양한 협업을 시도한다고 해도, 작은 신생 기업으로서 성숙 기업과의 협업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일 수 있다. 미래차 산업 생태계에 새롭게 진입하고 있는 소프트웨어(SW)와 IT 기업에도 유사한 어려움이 존재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수많은 업계 관계자 목소리를 들어 본 바로는 자동차 분야의 기업인들은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교류하고 협력할 것인지를 항상 고민하고 있었다. 이들 모두 시장과 기술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서로의 상황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고 해결책을 찾는 자리에 목말라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교류의 장에 대한 고민은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계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예컨대 스타트업 강국으로 불리우는 이스라엘도 유사한 상황에 놓여 있다. 이스라엘은 정부 중심으로 미래차 생태계 육성을 위해 발 벗고 나선 나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교통·도로안전부와 혁신연구원이 합작해 '에코모션'이라는 기관을 설립했다. 에코모션은 매년 '에코모션 위크'를 개최해 정부·기업·학계·투자자간 교류를 촉진하는 거대한 장을 마련했다. 에코모션 위크 참가자들은 그곳에서 새로운 파트너십을 형성하는 것은 물론이고, 성공적인 협업 사례를 확인하며 모빌리티의 청사진을 그려보는 기회를 갖고 있다. 미래차 산업 생태계의 광대한 잠재력을 시사하듯이, 이 행사는 이제 이스라엘 최대의 연례 스타트업 행사로자리 잡았다.
자동차 산업의 격동기를 맞이한 지금 현실에서 '자산어보'의 교훈을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어부와 학자가 만나 새로운 지식과 변화를 창출하였듯이, 우리나라의 자동차 업계도 그간 놓여있던 벽을 허물고 걸작을 빚어낼 수 있지 않을까.
경쟁보다는 새로운 협력에 초점을 둔 이종기업간 교류의 장, 순수한 탐구심으로 다가올 변화를 그리는 창조의 장을 꿈꾸며 한국자동차연구원(이하 한자연)은 지난달 '자산어보(자동차 산업을 어우르고 보듬다)'라는 네트워킹 플랫폼을 새로 만들었다.
'자율주행'을 주제로 치러진 제1회 자산어보 행사에서는 자율주행 상용화 현황, 미국 샌프란시스코 로보택시 24시간 운행 현장 르포, 자율주행 정부 지원 방향 및 대표 연구개발(R&D) 지원사업 안내 등의 발표로 120여명 참석자들의 호응을 이끌었다.
이달 중순에 열린 두 번째 행사는 탄소중립 시대 키워드 중 하나인 '전기차'를 주제로 진행됐다. 참석자들은 전기차 충전인프라 이슈, 전기차 극한 환경 도전 및 시사점, 전기차 충전 산업 경쟁력 강화 방안 등의 발표를 통해 인사이트를 도출하고 향후 발전 방향에 대해 고민했다.
'자산어보'는 국내 모빌리티 산업계 구성원의 정기적 만남과 교류를 기반으로 유익한 정보를 공유하고, 구성원간 협업을 확대하는 목적으로 시작됐다. 자동차 핵심 기술을 연구하고 다양한 기술지원 업무를 수행하는 한국자동차연구원 고유의 기능을 바탕으로, 산업현장에서 도움이 되는 실용적 정보 및 기술을 제공하고자 한다. 매월 정기적으로 개최될 이 자리를 통해 우리나라의 미래차 생태계에 다양한 종이 튼튼히 자리 잡고, 정약전의 자산어보가 그러했듯이 우리 국민의 미래를 바꿀 만한 유용한 지식이 싹트길 염원한다.
나승식 한국자동차연구원장 ssna@katech.re.kr
〈필자〉서울 고려고와 서울대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콜로라도대에서 정보통신공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36회 행정고시를 통해 공직에 입문했다. 정보통신부 IT중소벤처팀장·지식정보산업과장, 지식경제부 기후변화정책과장·기계항공시스템과장·정보통신정책과장, 산업통상자원부 에너지신산업정책단장을 거쳐 국무조정실 산업과학중기정책관, 산업부 소재부품장비산업정책관, 무역투자실장, 통상차관보, 무역위원회 상임위원 등을 지냈다. 지난해 2월 제12대 한국자동차연구원장에 취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