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한나라 성제 시절이다. 어머니인 태후 왕씨의 가문이 권력을 장악해 나가고 있었다. 황제는 스승인 재상 장우에게 대응책을 물었다. 장우는 왕씨 가문이 두려웠다. 백성을 위해 선정을 베풀면 하늘이 도울 것이라며 얼버무렸다. 여기서 현감 주운이 등장한다. 황제에게 칼을 내려줄 것을 청했다. 황제의 눈을 가린 간신 장우의 목을 치겠다고 한다. 황제는 스승을 능멸했다며 주운을 처형하려 했다. 장군 서경기가 말려 겨우 목숨을 건졌다. 주운이 끌려 나가며 붙잡은 난간이 심하게 부서졌다. 뒷날 난간을 고치려 했는데 황제가 그대로 두라고 했다. 충직한 신하를 기억하기 위해서라며.
조선시대 교육서 삼강행실도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해피 엔딩일까. 아니다. 황제는 달라지지 않았고 주색잡기로 생을 마쳤다. 외척 왕망에게 나라를 뺏기는 원인을 제공했다. 장우는 왕씨 가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부귀를 누렸다. 주운은 낙향, 청빈하게 살다가 죽었다. 그는 훌륭한 공무원인가. 국가 위기를 보고 할 말을 했다. 그런데 자신의 명성을 높였을 뿐 달라진 것은 없다.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황제, 왕씨 가문, 장우를 궁지로 몰았다. 기개만 높았고 설득력이 없었다. 대안도 없었다. 최악의 공무원이 아닐 수 없다.
국가, 왕조, 정권의 초기는 역동적이다. 포용적인 환경에서 의견 제시, 토론과 행동이 활발하다. 안정기에 접어들면 겉보기와 달리 암세포가 싹튼다. 권력은 성과와 시간에 쫓기며 목표를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공무원과 대립관계에 놓인다. 결국 권력은 승리하고 공무원을 굴복시킨다. 권력이 보기에 공무원은 나약한 수구세력에 불과하다. 공무원이 의지를 잃고 복지부동하면서 국가는 서서히 쇠퇴한다.
경제, 사회, 문화가 복잡하고 첨단화하면서 여러 정부기관이 함께 하는 업무가 많다. 정책 목표를 달성하려고 다른 기관, 부서에 이런저런 요구를 했다간 직권남용이 되거나 감사를 받기 싶다. 적극행정을 피하고 무리하지 않게 된다. 디지털시대엔 교육 수준, 전문성, 실무경험을 갖춘 민간 실력자가 나타나 데이터, 인공지능 등 첨단산업을 주도한다. 정부가 국가경제를 주도했던 산업화, 정보화 시대와 사뭇 다르다. 정부가 정책을 내놓아도 순순히 따르지 않는다. 정부의 정책 목표와 결과에 더해 추진과정도 납득돼야 한다. 정부가 실수라도 하면 정치세력과 언론에 의해 뭇매를 맞는다. 영상, 녹취 등 데이터를 통해 증거가 남는 시대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나쁜 공무원이 된다. 말, 행동 모두가 감시, 견제에 놓인다. 권력 교체와 정책 변화에 따라 대외관계에서 갑자기 의견을 바꿔야 하는 경우도 있다. 국정감사 등 국회 통제 과정에서 웃음거리가 되기도 한다. 언론은 자극적인 화면으로 편집, 상황을 악화시킨다. 공무원 사회가 흔들리면 업무상 상하관계도 모호해진다. 자리 보전을 위해 서로 감시, 견제하는 관계로 바뀐다. 타 부서와의 협력은 어렵고 효율적인 업무집행이 쉽지 않다. 권력의 요구가 부당해도 피하기 어렵다. 따르지 않으려면 옷을 벗어야 한다.
디지털시대 공무원은 어떻게 해야 할까. 힘들어도 국가의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 권력의 목표와 정책이 국가에 도움되면 해결책을 찾고 아니면 따를 수 없다. 좋은 아이디어도 상관의 심기를 건드리면 추진하기 어렵다. 부하도 납득되지 않으면 따르지 않는다. 설득 능력이 중요하고, 일과 공을 나누어야 한다. 민간의 일을 뺏거나 경쟁해서도 안된다. 신기술, 신산업이 미래다. 규제할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해야 한다. 민간 안에서도 경쟁과 갈등이 치열하다. 분쟁을 신속하게 조정, 중재할 수 있는 역량이 있어야 한다. 국가자원을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배분하는 것도 중요하다. 민간 전문가 등 모든 자원을 활용해야 한다. 공무원의 능력과 열정은 국가를 지키기 위해 헌법이 쥐어준 최고의 방패다. 존중해야 마땅하다.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혁신과 공존의 신세계 디지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