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톡] R&D 예산 문제의 답은 신뢰에 있다

지난해 7월 발간된 '윤석열정부 120대 국정과제집'에는 주요 국정 목표 중 하나로 '연구개발(R&D) 질적 성장'이 담겨 있다. 구체적으로는 'R&D 예산을 정부 총지출의 5% 수준에서 유지한다'고 명시돼 있다. 이 보다 앞서 나온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백서'에는 “모험적 연구와 실험의 실패를 용인하며 정권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장기간 연구가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고 적시했다.

집권 초기 두 자료집에 윤석열 정부의 국가 R&D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지만 이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

윤석열 대통령이 2일 대전시 유성구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 열린 대덕연구개발특구 50주년 미래비전 선포식에서 퍼포먼스를 함께한 학생들과 대화하고 있다.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이 2일 대전시 유성구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 열린 대덕연구개발특구 50주년 미래비전 선포식에서 퍼포먼스를 함께한 학생들과 대화하고 있다.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지난 6월 윤석열 대통령이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R&D는 제로베이스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고, 이후 정부는 올해 대비 16.6% 줄어든 2024년 R&D 예산안을 내놓았다. 전년 대비 5조1626억원이 삭감된 25조9152억원이 편성됐다. 정부 R&D 예산이 깎인 것은 1991년 이후 처음이다.

윤석열 정부가 국정목표에서 밝힌 '총지출의 5%'에 근접하기 위해선 32조원 이상을 책정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못미치는 수준으로 삭감됐다.

정부 R&D 예산은 규모만 놓고 보면 매년 큰 폭으로 급증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총지출 대비 기준으로는 10년 전인 2014년 수준을 간신히 회복했고, 이제서야 겨우 5% 비중에 근접한 수준이다.

문제는 삭감 액수만은 아니다. 과학기술계를 '카르텔' 집단으로 규정하고 R&D 예산을 '눈먼 돈' 취급했다는 것이다. 쓰는 돈에 비해 성과가 없다며 혈세를 낭비하는 부도덕합 집단으로 내몰았다. 뢰할 수 없는 집단이 됐다.

R&D 투자가 줄면 그만큼 연구자들은 본업인 연구보다 행정과 기관 수익 업무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밖에 없다. 예산 삭감 보다는 연구개발 아이템 선정과 지원 방식, 검증·평가 방식을 새로 설계해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먼저다.

윤 대통령은 3일 '대덕연구개발특구 50주년 미래비전 선포식'에 참석해 “연구 현장의 우려를 잘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혁신적 연구는 성공과 실패가 따로 없는 만큼 실패를 문제 삼지 않겠다”며 정부의 지원을 약속했다.

아직 늦지 않았다. 기회는 남아있다. 국회 예산 심사 과정에서 정부 R&D 예산 삭감의 타당성을 면밀히 분석하고 조정과정에서 충분히 보완하면 된다.

예산 조정과 함께 현장 연구자들에 대한 신뢰 복원도 더 세심히 챙겨야 할 것이다. 이미 현장의 연구 의욕이 크게 꺾였다.

'신뢰한다'는 말을 들으면 누구든 절로 힘이 생기는 법이다.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생긴다. 국가 경쟁력을 이끌어갈 미래 주체들에게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말이다. 문제의 답은 신뢰에 있다.

성현희 기자 sunghh@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