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원을 가지고 마트에 가서 10만원어치 장을 봤다. 그런데 계산대에서 반드시 지금 구매해야 할 제품을 빠트린 게 생각났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해당 제품 구매를 위해 그 가격만큼 덜 시급한 제품을 빼는 게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행동 아닐까.
돈은 더 내지 않고 이미 구매한 품목도 줄이지 않은 채 시급한 제품까지 구매하겠다고 우긴다면 판매자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일반적 상거래에서는 벌어지기 어려운 일이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이 같은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곳이 있다. 바로 공공 소프트웨어(SW) 사업 분야다.
공공 SW 구축 사업에서는 수시로 발주처의 과업변경이 요구된다. 발주처는 기존 사업계획은 그대로 이행하면서 새로운 과업까지 해달라고 요구한다. 엄밀히 말하면 '과업추가'다.
새로운 과업을 요구하려면 비용을 추가로 지급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사업 기간도 늘려야 한다. 그게 어렵다면 기존 사업 범위 중 일부를 줄여야 한다. 그래야 수행사가 정해진 기한 내에 추가 비용·인력 투입 없이 사업을 마무리할 수 있다.
그러나 발주처는 '갑'의 위치를 이용해 기존 계획과 사업 범위는 바꿀 수 없다고 선을 긋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한번 수립한 사업계획을 바꾸는 것은 해당 사업 담당 공무원의 귀책 사유가 되기 때문이다. 감사를 받을 수도 있다.
그 공무원은 내부의 과업변경(추가) 요구도 거부할 수 없다. 법·제도 변화에 따른 요청 등 거부하기 힘든 다양한 요구가 사업 기간 내내 지속된다. 대형 사업 예산을 한 번에 책정해 집행하는 우리 공공 SW 사업 특성상 추가 예산을 확보하기도 어렵다.
이 같은 상황 때문에 과업심의위원회도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수행사는 울며 겨자 먹기로 더 많은 시간과 인력을 투입해 추가 과업을 처리한다. 여기에 드는 비용은 고스란히 수행사 손실로 돌아간다. 좋은 결과물이 나올 수 없는 구조다.
사회보장정보시스템을 비롯해 개통이 8개월 지연된 우체국 차세대 금융시스템까지 대형 공공 SW 사업의 문제 요인은 대부분 무분별한 과업변경에서 비롯됐다. 그럼에도 모든 비난은 SW 기업에 돌아간다. SW 기업 역량이 부족해 발생한 문제로 본질이 변색된다.
지나친 과업변경 요구는 사업을 지연시키고 결과물 품질을 떨어트린다. 사업 수행사 수익성을 악화시켜 우리 SW 산업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무분별한 과업변경을 줄이려면 담당 공무원이 초기 '계획 변경의 책임'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추가할 과업만큼 다른 과업을 줄여 전체 사업 범위를 유지하거나 사업 기간을 늘려 다음 해로 과업을 분배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처럼 계획 변경이 금기시되는 환경에서는 과업변경에 따른 폐단을 끊어내기가 어렵다. 제도와 인식 변환이 필요하다.
공공 SW 사업 부실 이슈가 지속되면서 SW 기업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진 상태다. 문제의 원인이 정말 SW 기업 역량 부족 탓인지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SW 사업 품질 확보와 SW 기업 경쟁력 향상을 위해 과업변경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한 때다.
안호천 기자 hca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