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을 보자. 보험회사 직원 '그레고르 잠자'는 가족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잘못한 일은 없다. 어느 날 아침에 벌레로 변해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가족의 따뜻한 보호를 받지만 끝내 골칫거리로 전락하고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아 죽는다. 벌레로 변신은 노동력, 직장, 가정의 상실이자 죽음을 의미한다.
의식주 생계를 위해선 돈이 필요하고 직장에서 일을 해 조달한다. 시장에 재화와 용역을 공급하는 기업 구성원이 되고, 급여로 재화와 용역을 구입하는 소비자가 된다. 산업화·정보화시대에는 새로운 산업이 만들어지고 정보통신으로 연결돼 경제가 끊임없이 성장했다. 취업과 근무가 어렵거나 빡빡하지 않았다. 미국 중심 세계화가 진행되며 비약적인 성장을 누렸다. 미국은 산업 설계, 기획 등 고부가가치 핵심 분야를 맡고 다른 나라는 제조, 생산 분야를 맡아 동반성장이 가능했다. 직장은 힘들어도 마음의 여유가 있고 교육 등 기회가 있었다. 임직원은 또 하나의 가족이었다. 능력이 미흡하거나 실수를 해도 가르치고 보듬었고 내보내지 않았다. 그게 가족이니까. 직장이 주는 편안함 속에 자아실현이 가능했다.
지금은 어떨까. 산업화, 정보화, 세계화로 달성한 글로벌 경제에 한계가 왔다. 대표를 비롯한 임직원은 실적 압박에 시달린다. 스트레스를 받는 임직원을 위해 자기계발, 친목모임, 심리상담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가동한다. 희망을 주지 못하니 불안과 자아상실에서 임직원을 구하지 못한다. 경영환경이 어려우면 채용인원을 줄이고 경영환경이 좋아도 기술로 노동을 대체한다. 동료, 선·후배 뿐 아니라 기계, 인공지능(AI)과 경쟁하는 시대가 됐다. 대기업 근무는 어떨까. 돈 많은 과부를 만난 총각처럼 편안하지만 왠지 공허함과 허탈감을 준다. 임직원을 가족처럼 대하기도 하지만 편하게 노동력을 쓰거나 힘든 일을 맡기고 싶다는 뜻에 그친다. AI 시대에는 소수의 고급 두뇌만 생존하고 부를 독점한다. 놀고 있는 임직원을 두고 보지 못한다. 기술에 의한 노동 탈락이 일상화된다. AI 기술이 노동을 끊임없이 대체한다면 직장을 잃는 것을 불성실, 무능의 결과로 볼 수 있을까.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양보했다고 봐야 한다. 더 큰 문제는 수요의 감소다. 소비를 하려면 직장에서 받는 급여가 필요하다. 임직원이 직장을 잃고 취업이 어려우면 소비자의 역할을 상실하게 된다. AI 등 디지털 시장의 생태계에서 재화와 용역을 구입해 줄 최종 소비자 가계가 사라지고 있다. AI가 만든 아무리 좋은 재화와 용역도 팔리지 않으면 의미 없다. 많은 사람이 직장에 재취업할 기회를 찾지만 쉽지 않다. 멀쩡한 차도와 인도를 뒤집고 다시 포설하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인위적 일자리를 만들기도 한다. 지속성이 없으니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여기서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 사람들이 경쟁에서 탈락해 불쌍해서 주는 것이 아니다. 수요가 사라지면 경제가 죽는다. 기본소득을 나눠줄테니 소비하라는 것이다. 기본소득은 일을 양보한 행위에 대한 대가다. 국가가 지급하지만 재원이 없으니 AI 기업의 수익을 재원으로 조달할 수밖에 없다. 로봇세, AI세를 부과해 기본소득 재원을 마련하자고 한다. 생체정보 등을 제공받는 대가로 '코인'을 주겠다는 기업도 있다. 그것으로 충분할까. 미래에 기댈 것이 없는 젊은 사람은 책임질 수 없는 결혼과 출산을 주저하고 포기한다. 나 혼자의 삶도 지켜내기 어렵다는 위기감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디지털시대엔 취업이 아니라 창업이 원칙이 돼야 한다. 남의 직장이 아니라 나의 직장을 만들고 가꿔야 한다. 대기업이 주는 안락함을 버리고 스타트업이 주는 모험에 미래를 맡겨야 한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만으로 쉽게 직장을 만들고 수익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AI기술, 금융, 세제 등 지원시스템을 강력하게 구축하고 실행하면 된다.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혁신과 공존의 신세계 디지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