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펜하이머'는 2시간이 넘는 러닝 타임 동안 단 한 순간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 만남을 재조명하는 마지막 피날레를 본 후 지금까지 머리를 떠나지 않는 한 문장이 있다. 바로 “돌이킬 수 없다”라는 문장이다.
영화가 제시한 것처럼 인류는 선택의 순간에 돌이킬 수 없는 길을 항상 선택, 파멸의 길로 다가가고 있다. 파멸의 길은 비단 살상무기를 만들어 서로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전쟁에 국한되지 않는다. 인류 탐욕으로 인한 자연 오염 가속화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부분까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기후 변화로 인해 단순히 날씨 변덕을 뛰어넘어 이제 우리 생태계가 어떠한 방식으로 변화할 지 예측하기 불가능할 지경이다. 기후변화에 대응해 세계 환경 단체 뿐만 아니라 국가 협약을 통한 자정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자본주의는 파멸과 자정의 인류 속성을 가장 잘 반영하고 성장해 온 체계다. 인류는 욕망의 굴레 속에서 발전해오고, 그 발전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이 뒤따라왔다. 선악이 아닌 내재된 속성에 따라 이익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진화하는 중이다. 이는 더욱 돌이킬 수 없는 길로 향하고 있다.
HBO 인기 드라마 중 하나인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있다. “Make the world a better place.” 즉,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자는 말이다. 흔히 스타트업 창업자와 초기 투자 업계에서는 스타트업이 세상을 지금보다 더 나아지게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스타트업 또한 분명 거스를 수 없는 욕망을 지닌 인간이 만들어 낸 사회적 생명체인데 왜 다를 수 있다는 것인가?
스타트업 구성원 개개인은 몰라도, 기업으로서 스타트업에는 분명 다른 점이 존재한다. 스타트업은 기존 체계에서 높은 효율성에 기인해 발생한 자본의 연속적 서비스가 아니다. 때로는 비효율적일지도 모르지만, 다양하고 새로운 가치에 집중해 탄생한 존재라는 점에서 출발점이 다르다.
스타트업은 탄생 자체가 새로울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누구도 해보지 않았던 새로움을 무수히 시도해 보는 것이 그 본질이다. 그 시도 중에는 우리를 파멸로 몰아가는 것이 아닌 정반대로 돌이킬 수 있는 시도가 분명 존재한다. 이는 기존 시장과 고객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대기업 사업과 결이 전혀 다르다. 다양한 시도를 통해 기존 시장과 경쟁이 아닌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그로 인해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특별한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하다.
바이오 분야 스타트업은 기존 제약사라면 시도하지 못했을 혁신 신약과 백신을 개발해 병으로 고통받는 많은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기후테크 중요도도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이산화탄소 농도를 줄이기 위한 이산화탄소 포집 기술, 빠르게 분해되는 생분해 플라스틱 기술 등이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에틸렌과 곰팡이 제거 등을 통한 농산물 유통 기간 연장 기술, 다양한 합성 물질을 대체할 천연 바이오 기술 등이 눈에 띈다.
에너지 분야로 눈을 돌리면, 생산성이 확보된 대체 에너지 분야,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해 줄 초전도체 분야, 원자력의 기존 문제를 개선한 소형원자로(SMR) 등이 있다. 이외에도 삶의 질 개선을 위한 헬스케어, 노동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형태의 로보틱스와 불편한 분들이 활용할 수 있는 웨어러블 로보틱스와 인공지능(AI) 기업, 농산물 생산 이상 현상에 맞서 인류 먹거리를 해결하기 위한 푸드테크 기업,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기업, 에듀테크 기업과 멘탈케어 기업도 그 범위에 들어갈 수 있다.
스타트업에서는 인류의 삶을 지속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있다. 항상 순기능만 있는 건 아니다. 플랫폼 기업은 고객이 향유하는 서비스를 통합 제공하고, 더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게 지원하는 서비스 혁신을 이뤘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아날로그로 제공되던 것들을 디지털로 변환하는 온·오프라인연계(O2O)의 예로 들 수 있다. 불과 10년 전까지 손을 들어 잡던 택시를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으로 잡고 레스토랑을 예약하고 그곳에서 식사한다. 또,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숙소를 잡고 해외여행을 떠난다. 이러한 서비스가 우리를 편리하게 하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하지만, 이로 인해 세상이 나아지고 한 걸음 나아가게 하기는 어렵다. 즉, 인류 본연의 삶이 근본적으로 나아지는 건 아니다.
새로운 시장을 창조해 가치를 만들어 내기 위한 기술적 혁신이 필요하고, 그 기술을 활용한 스타트업을 육성해야만 우리는 나아갈 수 있다. 연구소와 대학에서 연구 역량을 축적해 숙성된 기술을 활용하는 기술 창업 기업에서 그 가능성을 볼 수 있다. 일례로, 정보통신기술(ICT) 기업 뿐만 아니라 바이오분야에서 모더나의 mRNA 백신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망가뜨린 우리의 일상을 회복시켰다.
우리는 기술을 활용해 인류 삶을 나아지게 할 수 있는 스타트업에 관심을 가지고 투자해야만 한다. 필자가 재직하는 서울대기술지주는 5년간 200여개, 매년 40여개 스타트업에 도전적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투자 기업 중 유니콘에 근접한 기업을 성장시키기 위해 지원도 아끼지 않고 있다.
필자는 예전 대학기술지주에 대해 기고한 적이 있다. 대학기술지주는 대학의 시대적 소명이 교육과 연구에서 창업으로 진화함에 따라 대학의 창업생태계와 재정 자립을 위해 만들어진 주식회사다. 기술을 사업화하고 초기 기업에 투자할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현재 전국에 80여개 대학기술지주 회사가 있다. 서울대를 선두로 몇몇 대학기술지주가 초기투자기관 중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현재 서울대기술지주는 다양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으며, 투자 수익률에 집중하는 것뿐 아니라 인류 삶 증진시킬 수 있는 스타트업에 도전적 투자를 감행하고 있다. 이는 스타트업 투자를 통해 사회 부가가치를 상승시키는 것이 이 사회를 진보시킬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서 기인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어떤 분야에 주목해 투자해야 하는가?
최근 서울대기술지주가 12번째 펀드를 조성하면서 펀드 출자자에게 받은 질문이 있다. “최근 스타트업 투자 업계가 쉽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향후 어떤 분야에 집중해 투자할 것인가?”
쉽지 않은 질문이다. 나는 다음과 같이 답변을 했다. “저희는 생존이라는 키워드에 집중해 투자를 할 것입니다”. 여러가지 면에서 인류는 거스르기 힘든 파멸의 길로 나아가고 있고, 그 길을 조금이라도 지연시키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해결책을 찾아야만 한다.
최근 논의되는 기후테크, 에듀테크, AI, 에너지 부분 스타트업 모두 해결책을 제시할 저력을 지니고 있으며, 인류 삶을 지속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인류는 지금까지 수많은 난제를 해결해왔지만, 상황은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해야만 하고, 우리는 그러한 시도를 하고 있는 스타트업을 발굴하고 투자해 성장시켜야만 한다. 그래야 인류의 삶이 지속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는 기술 기반 스타트업이 필요하다. 민간에서의 혁신뿐만 아니라 대학이 오랜 기간 동안 발전시킨 기술을 활용하는 스타트업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이어져야 한다. 서울대기술지주도 인류의 생존과 지속 가능성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 기업을 발굴, 투자, 성장시키고 있다. 단순히 잘 사는 문제가 아닌 결국 생존에 대한 문제다.
영화 '오펜하이머' 마지막 장면에서 세상을 바꾼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은 인류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파멸로 향할 것을 염려한다. 우리 주변에도 위기 대응 한계를 넘어섰다며, 회의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필자는 아직 생존을 갈구하고 나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스타트업이 우리를 구원할 희망을 지니고 있고 우리는 그들에게 베팅해야만 한다. 세상은 더 나아지고 우리는 나아가야 한다.
목승환 서울대기술지주 대표 moksh@snu.ac.kr
〈필자〉서울대에서 재료공학과 경제학을 전공, SK커뮤니케이션에서 사업전략과 신사업을 경험하고 이후 10여년 동안 스타트업 창업과 자금회수(EXIT) 경험을 바탕으로 투자자에 입문했다. 공공 영역에 스타트업 생태계의 기여가 필요하다는 결심으로 대학 기술지주에 입사해서 2020년 내부 승진으로 대표직을 맡고 있다.2017년 서울대STH 제1호를 시작으로 창업초기 벤처조합, 핀테크혁신 벤처조합 등 모태펀드, 성장금융과 외부 출자자가 연계된 9개 펀드, 민간으로 구성된 성과 공유 기부형 펀드를 비롯한 총 10개의 1000억원 규모 펀드를 운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