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정부는 올해 5월 '국가 주도 표준 전략'을 발표했다. 민간 중심 표준 정책을 펼친 미국이 정부 차원에서 중장기 로드맵을 마련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강력한 정부 지원을 앞세워 반도체, 인공지능(AI) 등에서 국제표준을 선점해 중국 등 경쟁국을 견제할 방침이다.
# 지난 8월 중국 공업정보화부 등 4개 부처는 '신산업 표준화 시범사업 실시 방안'을 내놓았다. 2025년 신흥산업 발전 표준 체계를 정비하고, 미래산업을 혁신할 표준을 마련한다. 이를 위해 300개 이상 국제 표준 제정에 참여, 중점 분야에서 국제표준 전환율 90% 이상 달성할 계획이다. 앞서 국가 표준 전략을 공개한 미국에 맞불을 놓았다.
글로벌 표준 전쟁이 본격화했다. 미국, 중국 등 주요 기술강국이 첨단산업 주도권을 잡기 위해 국제표준 개발에 속속 뛰어들고 있다. 국제표준을 선점하면 다른 국가들이 이를 반드시 따를 수밖에 없어 시장 경쟁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 한 국가만 정점에 오를 수 있는 '왕좌의 게임'이다.
진종욱 국가기술표준원 원장은 “미국, 중국 등 주요국들이 핵심 신기술 표준전략을 직접 발표함으로써 국가 간 표준 경쟁이 한층 더 치열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국 정부도 글로벌 첨단산업 생태계에서 새로운 '룰 세터'(Rule setter)로 자리 잡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특히 산업통상자원부 국표원은 5년마다 수립하는 국가표준기본계획을 기반으로 차세대 신기술 표준화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국표원은 최근 '연구개발(R&D) 표준연계'를 국정과제로 지정하고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표준과 국가 R&D 사업을 연계·개발한 표준안을 국제·국가표준으로 제정, 신기술의 사업화를 촉진하는 게 핵심이다. 해당 사업에 참여하는 여러 기업·대학은 국제표준이라는 성과를 거두면서 우리나라 산업 경쟁력 강화에 큰 힘을 싣고 있다.
◇우수 기술, '표준'으로 꽃피운다
국표원이 지원하는 'R&D 표준연계'는 연구개발 초기부터 표준을 적용·활용해 R&D을 진행하는 형태다. 표준이 없는 분야에서는 새로운 표준을 개발해 적용한다. 표준을 기반으로 우수한 신기술을 빠르게 사업 영역으로 끌어들여 경쟁국이나 경쟁사에 뒤처지지 않도록 한다.
국표원과 한국표준협회는 이 같은 과정에서 후방지원군 역할을 한다. 표준화 동향 정보를 상시 제공하는 것은 물론 새로운 표준을 개발해야 하는 과제에는 전문가를 투입해 표준화 전략 수립을 돕는다.
강명수 표준협회 회장은 “표준화가 익숙하지 않은 연구 현장에 표준개발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 이를 자기 주도적으로 수행하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R&D 표준연계는 고질적 자금난·인력난에 시달리는 국내 중소·중견기업을 도와 해외 시장으로 이끄는 '셰르파' 역할도 하고 있다.
차량 사고감지 시스템 기술 전문업체 자스텍엠은 미국 내 경쟁입찰에서 80억원 규모 수주에 성공했다. 나스닥 상장사를 포함된 30여개 경쟁사를 제치고 일군 성과다. 기술 개발과 함께 표준화 활동을 함께 진행한 것이 적중했다.
백용범 자스텍엠 대표는 “ISO 국제표준 제정 실적을 인정받아 높은 점수로 최종 납품 계약을 진행했다”면서 “R&D와 표준이 연계돼 성과물의 상용화를 촉진한 것은 물론 해외 판로를 여는 효과를 거뒀다”고 전했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도 표준을 활용해 에너지저장장치(ESS) 기업의 해외 진출에 힘을 보탠다. 전력 수요관리 및 비상전원 활용방안을 IEC 국제표준으로 반영한 덕이다. 세방전지, 코캄, 그리드위즈 등 ESS 활용 기업에 표준화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고 있다.
안윤영 ETRI 박사는 “R&D 표준연계가 표준에 취약한 중소기업의 이해를 돕고 경쟁력 강화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R&D 표준연계, 선택 아닌 필수
국표원은 지난달 30일 인터컨티넨탈 서울 코엑스에서 'R&D 연계 우수표준 성과 공유회'를 개최했다. 국표원과 표준협회, 한국산업기술기획평가원(KEIT), 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 국가 R&D 수행기관 등에서 70여명이 참석했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제정된 주요 우수 표준화 사례를 공유하고 유공자에 시상했다.
김규옥 한국교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서영교 한국자동차연구원 수석연구원, 류호준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이 각각 국제·국가표준을 제정한 공로로 산업부 장관상의 영예를 안았다. 자율주행버스 안정성과 연결성 성능평가 및 시험 국제표준을 개발한 김규옥 위원은 R&D 체계와 표준 개발 과정을 직접 설명해 눈길을 끌었다.
이날 참가자들은 주요국이 첨단기술 표준 경쟁에 사활을 걸고 있는 상황을 고려해 'R&D 표준연계'에 가속을 붙여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특히 정부가 중점 추진하는 '초격차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R&D와 연계한 표준개발이 꼭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 연구자는 “국제표준 위상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고 영향력이 높아졌다”면서 “지속적인 정부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진종욱 국표원장은 “연구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이뤄낸 성과는 우리나라 산업계 기술혁신을 지원하고, 국제적 신뢰도를 한층 높여줄 것”이라고 치하하면서 “R&D와 연계한 표준개발이 기술개발과 시장 창출의 강력한 촉진제가 되도록 역량을 집중하겠다”고 말했다.
윤희석 기자 pionee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