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2023년도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다. 지난해부터 고물가·고금리 상황이 계속되고, 글로벌 분쟁 또한 격화되면서 당초 기대와 달리 경기 회복이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반도체 경기 하강에 따른 수출 부진이 한동안 계속되면서 우리 경제의 위기감 또한 고조되기도 했다.
이런 어려움과 불확실성 속에서도 디지털은 우리 일상에 더욱 가깝게 파고들면서 디지털 심화라는 새로운 물결로 자리잡고 있다. 올해 초 챗GPT로 대표되는 초거대 인공지능(AI)의 등장은 멈추지 않는 디지털 혁신의 상징과도 같다. 7년 전 알파고가 우리에게 큰 충격을 줬지만, 실제 활용은 기대보다는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초거대 AI는 누구나 쉽고 편리하게 활용하는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상상 속에 머물렀던 디지털이 일상으로 현실화되는 결정적 전환의 순간인 것이다.
특히, 이런 결정적 전환은 AI 혁신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컴퓨팅파워, 즉 반도체의 극적인 발전을 토대로 촉발됐음은 물론이다.
이제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2024년, 디지털 혁신은 어떻게 전개될까? 여전히 AI와 반도체는 디지털 혁신의 핵심 동력으로 공진화해 나갈 것이다. 이 과정에서 디지털 전반의 성능과 경쟁력을 재정립할 소프트웨어(SW)의 가치에 시장은 다시 한번 주목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디지털이 일상의 필수재로 자리잡음에 따라, 신뢰와 안전의 가치는 기술혁신 못지않게 중요한 경쟁요소로 부각될 전망이다.
◇모든 곳의 AI, 디지털 성장엔진 재점화
내년에도 AI는 단연코 디지털 혁신의 선두 주자일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 초거대 AI 성능과 잠재력을 증명하는 것에 집중했다면, 이제는 본격적인 대중화에 주력할 것으로 예상된다. 높은 운영비용과 막대한 전력 사용은 극복해야 할 가장 큰 장애물이다. 적은 훈련 시간, 소량 데이터로도 깊이있는 학습이 가능한 소형 대규모 언어모델(sLLM)과 같은 AI 경량화 혁신이 더욱 확대될 것이다.
초거대 AI의 등장으로 방대한 데이터의 학습·추론을 위한 컴퓨팅파워 수요 또한 급증했다. 이런 과정에서 반도체가 다시 한번 도약의 기회를 맞고 있다. AI 학습·추론 분야에서 최강자로 등극한 그래픽처리장치(GPU)의 영향력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와 함께 영상인식과 같은 특화된 AI 추론에 강점을 가진 신경망처리장치(NPU)가 GPU가 담당하지 못하는 틈새를 파고들며 시장을 형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AI를 지원하는 광대역 메모리(HBM)와 같은 고성능 반도체를 중심으로 메모리 분야에서도 반등이 기대된다. AI 경량화와 반도체 성능혁신은 스마트폰과 같은 디지털 기기 자체에서 AI가 구동되는 '온디바이스 AI'라는 새로운 디지털 환경을 제공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AI 서비스는 대부분 클라우드를 기반으로 운영되고 있다. 클라우드 서비스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서비스 지연과 정보 유출 가능성 같은 한계도 있는 게 사실이다. 온디바이스 AI는 이런 한계를 보완하고, 사용자에 최적화된 서비스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새로운 성장 품목으로 기대해 볼 만하다.
이제 '일상의 모든 곳'은 AI 서비스 경쟁의 장이 될 것이다. 특히, 콘텐츠는 AI 활용 효과를 가장 빨리 체감할 수 있는 분야 중 하나다. 음악·이미지까지 스스로 만들어 내는 생성형 AI 덕분에 전문적인 창작 기술과 막대한 비용이라는 진입장벽이 획기적으로 낮아지고 있다. 이는 1인 미디어에 대한 수요 증가와 맞물리면서 누구나 창작자가 될 수 있는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디지털 혁신, SW 답을 찾을 것
반도체 기업 최초로 시가총액 1조 달러를 돌파한 엔비디아, 역대 최대 매출을 경신한 마이크로소프트(MS), 올 한해 가장 두각을 보인 이런 기업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MS의 챗GPT, 엔비디아의 CUDA와 같이 독보적인 SW 경쟁력을 확보한 기업이라는 점이다.
가히 SW 경쟁력이 곧 기업의 경쟁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도체부터 디지털 기기에 이르는 모든 디지털의 성능과 경쟁력이 SW를 통해 새롭게 정립되면서, SW의 가치에 더욱 더 주목하게 될 것이다.
SW가 게임체인저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또 다른 영역은 네트워크 산업이다. 그간 네트워크 산업은 하드웨어(HW) 중심의 폐쇄형 구조로 ,특정 기업·장비에 대한 종속성과 함께 네트워크 구축·운영의 고비용 구조가 지속돼 왔다. 이런 네트워크 시장에서 다양한 제조사의 통신장비를 클라우드·SW를 기반으로 상호 연동해 개방형으로 무선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오픈랜(Open-RAN)이 새로운 경쟁구도를 형성할 것으로 예상된다. 장비산업 후발주자인 국내 기업에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을지 주목해 볼 만하다.
일상에서도 자율자동차·로봇과 같은 모빌리티 산업을 중심으로 SW의 가치를 체감하게 될 것이다. SW는 더 이상 차량의 일부가 아닌 차량의 성능과 가치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앞으로의 자동차는 SW로 자율제어·관리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콘텐츠와 온라인 쇼핑을 즐기는 서비스 플랫폼으로 변모할 것이다. 로봇 역시, 자가 학습과 행동 지능의 축적을 통해 사람을 닮은 휴머노이드로 진화해 나갈 것이다.
◇안전과 신뢰, 새로운 경쟁요소로 부상
디지털의 일상화와 함께 신뢰·안전의 가치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 요건이다. 네트워크의 단절과 디지털의 오작동은 이제 재난이라 할 만큼 막대한 피해와 비용을 수반한다. 네트워크와 디지털 서비스의 안정성 보장과 이에 대한 책임은 민간과 공공을 가리지 않고 강조될 것이다. 또, 최근 기후변화가 촉발하는 재난 재해가 빈번해지고 있다. 디지털트윈 기반 재난 예방과 같은 디지털을 활용한 안전 대응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추진 동력을 얻을 것으로 예상된다.
글로벌 환경에서도 미·중간 기술패권경쟁은 이제 변수가 아닌 상수로 자리잡고 있다. AI·반도체를 중심으로 초격차 우위를 지키고자 하는 미국과 기술 자립을 추구하는 중국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최근에는 진영 대결로 경쟁 양상이 확산되면서 디지털 생태계의 이원화·블록화 경향이 심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경쟁환경의 변화가 수출 중심의 우리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예의 주시해야 한다.
디지털은 이제 국가안보의 핵심적 전략자산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서 볼 수 있듯이, 로봇.드론을 활용한 자동·무인화 전쟁이 현실화되고 있다. 더 나아가 다양한 작전환경에 능동 대응이 가능한 디지털 기반 모자이크 전(Mosaic warfare)으로 전쟁 방식이 바뀌고 있다. 전장의 승패를 좌우할 디지털 국방력의 우위를 점하기 위한 각국의 각축전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된다.
마지막으로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디지털 시대에 대한 대응이 본격화될 것이다. 디지털 심화는 생산성 향상, 사회문제 해결과 같이 기회와 편익을 제공하지만, 그 이면에는 일자리 대체, 가짜뉴스, 디지털 격차와 같은 문제점 또한 내포하고 있다. 내년에는 디지털 기술의 혁신과 사회적 신뢰가 균형을 맞춰나가는 노력이 확산될 것이다. 설명 가능한·공정한 AI와 같이 디지털 자체의 신뢰성 강화와 함께 AI 진위 탐지, 안전 브레이크와 같이 오남용 차단을 위한 기술·제도적 노력이 병행될 것이다.
◇대한민국이 열어가는 새로운 디지털 시대를 기대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디지털 시대는 문명사적 변화로 표현될 만큼 경제·사회 전반에서 일대 혁신을 촉발하고 있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다. 이미 세계 각국은 디지털 시대를 맞이할 준비에 여념이 없다. 우리 정부 역시 9월 '디지털 권리장전'을 발표하며, 디지털 심화 시대 대응과 함께 국제적 공감대 형성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다가올 2024년에는 그간 노력이 선언적 규범을 넘어, 사회적 수용을 위한 법제화 등으로 구체화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기술표준, 통상기준 등으로 확산되며 실물경제에도 본격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우리가 만든 디지털 규범이 글로벌 기준으로 안착할 수 있도록 신속하고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디지털 시대의 진정한 강자로 도약하거나 도태될 수 있는 결정적 전환의 순간에서, 대한민국이 새로운 시대의 혁신 리더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더욱 박차를 가하는 한 해가 되길 기대한다.
전성배 정보통신기획평가원(IITP) 원장 esbjun@iitp.kr
〈필자〉연세대를 졸업하고 1991년 체신부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30년간 정보통신부, 방송통신위원회, 미래창조과학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에서 요직을 두루 섭렵했다. 미래창조과학부에서는 전파정책국장과 대변인, 과기정통부 출범 이후에는 통신정책국장과 기획조정실장을 역임한 정보통신기술 전문가다. 2021년 1월 IITP 원장으로 부임, 30년 축적한 정보통신기술(ICT) 분야 네트워크와 경험을 바탕으로 ICT 연구개발(R&D)을 진두지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