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적으로, 세계적으로 첨단산업을 둘러싼 관심이 뜨겁다. 반도체, 이차전지 같은 첨단산업은 경제적 부가가치는 물론 국가의 생존 전략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른바 기술패권 시대에는 첨단산업 역량이 그 나라의 외교, 안보적 위상과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한편에선 '초격차'를 위해, 한편에선 '추격'을 위해 각국이 매진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도 정권을 초월해 반도체, 이차전지, 데이터, 바이오 같은 첨단산업 육성에 팔을 걷어 붙였다. '국가첨단전략산업 경쟁력 강화 및 보호에 관한 특별조치법(국가첨단전략산업법)'과 '국가전략기술 육성에 관한 특별법(국가전략기술육성법)'은 모두 문재인 정부 때 입법이 시작돼 윤석열 정부에서 본격 시행됐다. 첨단산업 역량 강화가 정권을 초월한 국가적 과제임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최근 주목할 만한 현상은 첨단산업과 전략기술을 중심으로 한 '클러스터' 범람이다. 첨단산업·전략기술은 대개 특정 분야 연구개발(R&D)로는 확보할 수 없으므로 다양한 기술과 산업을 아우르는 융·복합은 필수다. 자본, 인력, 기술을 한 데 모아 이른바 '생태계'를 만드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따라서 첨단산업 역량 강화를 위한 '클러스터링'은 불가피하고, 또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단순히 클러스터, 국가산단을 많이 만들기만 한다고 될 일은 아니다. 클러스터에는 고려해야 할 요소가 복잡하고 다양하다. 질 좋은 자본과 기술, 인력이 필수다. 충분한 산업용지·용수 같은 인프라도 필요하다. 또 하나 간과해선 안 되는 중요한 요소가 바로 에너지, 즉 전력이다.
첨단산업은 전기 먹는 하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9월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향후 10년 내 데이터센터의 전력 수요가 올해보다 42배 급증할 것으로 전망됐다. 조만간 마련될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의 가장 중요한 배경 중 하나는 '전력 수요 급증'이다. 산업부 관련 자료를 보면 반도체·이차전지 등 첨단산업 신규투자, 데이터센터 확대, 전기차 확산 등 전력수요 확대요인이 '전력시스템 여건 변화'의 첫머리로 기술됐다.
첨단산업 성장과 '전력 수요 급증'은 동전의 양면 같은 관계다. 따라서 첨단산업 클러스터를 조성하려고 한다면 첫번째로 고려해야 할 요소가 바로 전력 수급 대책인 것이다. 당장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보자. 정부와 업계는 투자와 조성이 마무리되는 2050년 10GW 이상의 전력수요를 예상하고 있다. 이는 현재 수도권 전력 수요의 약 4분의 1 수준이다. 말 그대로 초비상이다.
정부는 2~3년 안에 지을 수 있는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소를 산업단지에 세워 급한 불을 끈다는 방침이다. LNG 발전소 6기면 3GW 정도의 전력을 공급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 산단 내 핵심 기업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사용전력 100%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한다는 'RE100'을 선언한 상태다. 애플 등 고객사의 RE100 충족 압박도 거세다. 그런데 RE100은 LNG 발전소에서 생산한 전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RE100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나머지 7GW에 대해서는 아직 뾰족한 전력 수급 대책이 마땅치 않다는 게 더 큰 문제다. 산단 내 대규모 재생에너지 발전원을 마련하든, 다른 지역에서 대규모로 전력을 끌어오든 대책을 세워야 한다. 막대한 비용 손실도 불가피하다. 일각에서 클러스터 조성계획의 근본적 재검토와 획기적 방향 전환을 주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처럼 전력 문제야말로 첨단산업 클러스터 구상의 가장 큰 아킬레스건이다. 그래서 첨단산업을 육성하려면 시야를 비수도권으로 돌려야 한다. 우리나라는 수도권이 가장 많은 전력을 소비하지만, 전력 생산은 지방에 의존한다. 2021년 기준 지역 별 전력자급률을 보면 서울은 11.3%, 경기는 61.62%에 그친 반면 충남은 227.92%, 부산은 191.54%에 이른다. 첨단산업의 가장 큰 난제인 전력난 해결의 열쇠가 지방에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수도권 중심으로 첨단산업을 육성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효율적이지도 않다. 이미 살펴봤듯 첨단산업 특성상 전력 수급 대책이 없는 클러스터 구상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따라서 첨단산업의 탈수도권은 산업육성 측면에서도 선택이 아닌 필수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탈수도권을 전제로 첨단산업 육성 전략을 세워야 한다. 비수도권의 가장 큰 약점은 인력인데, 이는 정부와 기업의 노력으로 보완할 수 있다. 지방에도 수도권 못지 않게 초급부터 고급까지 체계적인 과학기술 인력 생태계가 갖춰져 있거나 잠재력이 있는 지역들이 있다. 또, 대규모 자본 이동은 인력 이동을 일정 부분 견인한다. 따라서 정부가 적극적으로 혜택을 부여하고 기업도 투자에 나선다면 보완 가능하다. 비수도권 중심의 첨단산업 육성 전략은 충분히 가능하고 바람직한 시나리오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첨단산업을 육성하고 각종 클러스터를 조성하는 건 바람직한 일이다. 다만 수도권 중심의 낡은 전략을 반복해선 곤란하다. 정부가 3월 한국형 아이멕(IMEC) 구상을 밝힐 땐 '비수도권'을 명시했다가 한국첨단반도체기술센터(ASTC)로 구체화할 때 이를 쏙 빼버린 것은 불길한 징조다. 첨단산업 육성은 산업 지형을 재설계하겠다는 근본적 인식 전환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조승래 더불어민주당 의원 yuseong0413@daum.net
〈필자〉노무현 참여정부 행정관·비서관 출신으로, 더불어민주당 재선 국회의원이다. 초선 때부터 정책 역량과 조정 능력을 인정받아 이례적으로 교육위원회 간사를 맡았다. 21대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간사로 활동하고 있다. 민주당 원내 선임 부대표와 제4정책 조정위원장을 지냈다. 과학기술·정보통신기술(ICT)·게임·문화콘텐츠 같은 미래 먹거리와 일자리, 인재 양성에 관심이 많다. 2020년에 국회 문화콘텐츠 포럼을 만들어 모임을 꾸려 가고 있다. 세계 최초로 구글갑질방지법 입법을 주도하며 '빅테크 저승사자'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