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오시오.”
“바쁘신데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1985년 10월 29일. 청와대 대통령 접견실.
전두환 대통령은 이날 부속실을 통해 접견 신청을 한 윤석순 한국해양소년단연맹 총재를 악수로 맞이했다.
윤석순 총재는 11대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냈다. 윤 총재는 국회의원 시절인 1984년 11월 한국해양소년단연맹 육성에 관한 법률을 대표발의했다. 그는 당시 법안 제안 이유로 “우리나라는 해양 발전의 여건을 갖추고 있지만 개발이 늦고, 해양산업 역시 발전하지 못하는 실정”이라면서 “청소년에 대한 해양 교육훈련을 통해 해양 사상을 고취하고 투철한 국가관과 진취적인 기상을 함양하기 위해 설립한 한국해양소년단연맹을 지원 육성, 해양 개발과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법안을 발의한다”고 밝혔다. 이 법안은 윤석순 의원과 김진기 의원 두 사람이 공동 발의했고, 국회의원 103명이 서명했다. 이 법안은 소관 상임위원회인 교통체신위원회를 거쳐 그해 12월 14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원안대로 가결했다.
정부는 이 법률을 1984년 12월 31일 법률 제3785호로 공포했다. 이 법률 제정으로 한국해양소년단연맹은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협조와 지원을 받을 수 있고, 국·공유 재산 대부나 시설지원 등도 받을 수 있게 됐다. 이 같은 연유로 윤석순 총재는 이듬해인 1985년 4월 9일 한국해양소년단연맹 제5대 총재에 취임했다.
“남극탐험에 관해 보고할 게 있다면서요.”
“네, 각하께 남극탐험대 구성과 탐험계획에 관해 보고드리고자 합니다.”
윤석순 총재는 취임한 해 8월부터 남극탐험이란 담대한 계획을 추진했다. 그는 산악등반이나 탐험 경력이 전무했다. 그러나 남다른 호기심으로 사방팔방으로 남극에 관한 내용을 알았고, 특히 그해 8월 열린 제6회 해양축전에서 어린 학생과 원로단원들이 한데 어울려 “나가자, 바다로”를 외치는 순간 무슨 일이든지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 충만, 남극탐험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윤 총재는 단장 1명과 등반 경험자 7명, 해양연구소 과학자 2명, 대원과 취재진 7명 등 17명으로 탐험대를 구성했다. 단장은 윤 총재가 직접 맡았다. 그해 10월 중순쯤에는 전 대원이 현지 적응훈련까지 모두 마쳤다.
11월 6일에는 남극탐험이란 대장정에 오른다는 일정까지 확정했다. 마지막 남은 일은 정부 보고였다. 그러나 정부 어느 부처 누구에게 보고할지 고심했지만 대통령 외에는 보고할 곳이 없었다.
윤석순 총재는 그해 10월 하순 청와대에 대통령 접견을 신청했다. 민간단체 총재가 대통령을 단독으로 만난다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단체와 관련한 일은 관련 부처에서 보고하는 게 상례였다. 그러나 당시 해양소년단연맹은 소관 부처가 없었다. 윤 총재는 대통령 부속실을 통해 접견 요청을 하고, 10월 29일 접견 시간을 확정했다. 접견 시간은 단 15분이었다.
전두환 대통령 회고. “1985년 10월 한국해양소년단연맹 윤석순 총재가 남극탐험에 관해 보고할 일이 있다며 접견을 요청했다. 정부기관이나 관련 비서실도 거치지 않고 부속실을 통해 직접 접견을 요청해 온 것이다. 관례를 벗어난 일이었지만 나는 취임 초인 1981년 이미 남빙양(南氷洋)의 크릴어업을 위한 남극조약 가입을 적극 추진하도록 강력히 지시한 일이 있었고 남극 진출 문제는 내가 특별히 관심을 갖고 있는 사안이어서 보고를 받기로 했다. 윤 총재가 접견 요청을 하기 6개월 전인 1985년 4월 우리가 남극해양생물자원보존협약에 가입했다는 보고를 받은 바 있었다.”(전두환 회고록 2)
윤석순 총재는 이날 남극탐험 목적에 대해 아래와 같이 보고했다.
“남극탐험 목적은 인류 마지막 자원 보고인 남극에 대한 관측탐험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1990년 이전에 남극조약 가입 △자원개발의 공동 참여 계기 마련 △진취적 국민기상을 고취시켜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성공리 개최를 크게 기여하는 데 있습니다. 청소년단체가 남극 탐험에 나서는 일은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습니다.”
윤석순 총재는 “남극관측탐험대는 1985년 11월 6일 출발하기로 일정을 확정했으며, 이 탐험대는 해양소년단연맹이 주축이 돼 남극조약 가입을 목표로 남극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보고했다.
전 대통령은 청소년 단체가 정부 현안 과제인 남극조약 가입을 목표로 남극에 도전하겠다는 보고에 대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보고를 받았다.
윤석순 총재는 이어서 남극대륙 현황과 세계 각국의 남극 진출과 남극조약, 각국 남극 기지와 활동상을 보고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보고를 받으면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우선 남극탐험이 해양소년단연맹의 주관 아래 이뤄진다는 사실에 놀랐다. 국내 산이나 바다에서 훈련하는 일도 아니고 극지를 탐험하는 일인데 청소년단체가 과연 감당할 수 있는 것인지 걱정스러웠다.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드높은 기상과 도전정신에 대견한 생각이 들었다. 나도 청년 장교시절 미국에서 두 차례 군사교육을 받으면서 극한상황에서 생존훈련을 받은 경험이 있었기에 무엇보다 대원들의 안전대책이 가장 걱정이었다. 나는 조난을 당하거나 예기치 않은 긴급상황이 발생할 경우 대책을 일일이 물어 봤다. 식량이나 개인장비, 통신수단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점검하고 확인했다.”(전두환 회고록 2)
윤석순 전 총재 증언. “대통령께서 추진계획을 보고하자 자리를 고쳐 앉으시며 '긴급사태 발생이나 조난시에는 어떻게 할 것이냐'를 비롯해 통신수단, 식량, 개인장비에 이르기까지 하나씩 점검하시면서 확인하셨다. 그 바람에 애초 부속실과 약속한 보고시간인 15분을 휠씬 넘겼다.”(희망의 대륙 남극에 서다)
윤석순 총재는 마지막으로 건의 사항을 보고했다. “관측탐험이 성공하면 정부 안에 특별기구를 구성해서 남극조약 가입을 적극 추진해 주십시오. 또 남극기지를 건설하고 과학기술처 산하에 남극연구소를 설치해 주실 것을 건의드립니다.”
이런 내용의 보고가 끝나자 1시간 30분이 지났다. 윤 총재는 보고가 끝나자 '남극관측탐험계획'이라는 제목 서류에 재가를 요청했다. 전 대통령이 서류를 보다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어, 윤 총재. 이건 주무장관이나 국무총리 부서(副署)가 없지 않나. 어떻게 대통령이 이런 서류에 결재할 수 있나. 이건 규정에 없는 일이오.”
윤석순 총재가 재가를 요청한 서류에는 국무총리나 관계 장관 또는 수석비서관 등의 부서란(副署欄)이 없었다. 단지 대통령 재가란(裁可欄)만 있었다.
윤석순 총재는 그 순간 '큰일났다'는 생각에 크게 당황했다. 그러나 그냥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전두환 대통령에게 거듭 재가를 간청했다.
윤석순 총재의 회고. “각하, 이 일은 한국 미래를 위해 누군가는 희생을 감수하면서 해야 할 국가 중대사입니다. 지금 우리 대원들은 청와대 앞에서 각하 재가를 받고 나올 저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각하께서 재가를 안 해 주시면 보고드렸다는 사실조차 믿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일개 청소년단체의 모험적인 탐험에 연구기관이 어떻게 박사급 직원을 파견할 수가 있겠습니까. 과학자 없는 관측탐험은 허사입니다. 역사상 초유인 남극관측탐험은 주무 부서가 없기 때문에 용기를 다해 각하께 보고드린 것입니다. 저를 믿어 주십시오. 꼭 성공해서 전원이 무사히 귀국하겠습니다”(희망의 대륙 남극에 서다.)
지성이면 감천인가. 전두환 대통령은 윤석순 총재의 말이 끝나자 바로 펜을 잡아 재가란에 힘주어 서명했다. 그러면서 당부했다.
“윤 총재, 꼭 성공하고 무사히 돌아오시오.”
“각하, 반드시 성공하겠습니다.”
대통령 접견실을 나서는 윤석순 총재의 마음은 하늘을 날듯 가벼웠다. 가슴속에서 '해냈다'는 자신감이 용암처럼 솟아올랐다.
전두환 대통령은 윤석순 총재를 보낸 후 외무부에 “미국·칠레 정부와 협조해서 우리 탐험대가 긴급사태가 발생할 경우 탐험대 안전에 만전을 기할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하고, 주재공관에서 탐험대에 필요한 모든 편의를 제공하라”고 지시했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한국 최초의 남극극지탐험대가 그랬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