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위 반도체 장비사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의 한국 R&D센터 설립은 고객사, 즉 삼성전자·SK하이닉스와 공동 연구개발(R&D)을 강화하기 위한 포석이다. 삼성과 SK하이닉스는 세계 D램 시장 1, 2위고 낸드플래시 시장에서는 톱3다. 시장을 과점할 정도로 메모리 반도체에서는 단연 앞서 있어 이들이 차세대 반도체 시장까지 주도할 것이라는 판단 하에 파트너십을 공공히 하려는 전략적 조치로 풀이된다.
실제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인공지능(AI)으로 떠오른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도 선두를 달리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지난해 3분기 세계 D램과 낸드플래시 시장 점유율은 각각 39.4%와 31.4%다. SK하이닉스는 각각 35%와 20.2%를 기록했다. 이들의 합산 점유율은 D램 74.4%, 낸드플래시 51.6%에 달한다.
여기에 삼성전자는 시스템 반도체 사업을 영위하고 세계 2위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업체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지난해 3분기 세계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12.4%로 TSMC 57.9%에 이어 2위다. TSMC와 함께 세계 초미세공정 기술 개발을 주도하는 회사로 꼽힌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가 갖는 세계 반도체 시장 위상이 높아지면서 반도체 장비사들에 이들과의 협력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램리서치, 도쿄일렉트론(TEL), 어플라이드, ASML 세계 4대 반도체 장비사들이 한국에 R&D를 두려는 이유다.
램리서치는 지난 2022년 경기도 용인에서 R&D센터를 개소했다. TEL도 같은해 경기도 화성 R&D 시설 증축에 2000억원을 추가 투자했다. ASML는 지난해 12월 삼성전자와 공동 R&D센터를 짓는데 1조원을 투자한다고 발표했다. 네덜란드 증착 장비 업체 ASM도 2019년 경기도 화성시에 국내 첫 R&D·제조센터를 개소한 데 이어 제2 R&D·제조센터를 2025년 가동을 목표로 1억 달러를 투자했다.
세계 반도체 장비사들의 R&D센터가 국내에 속속 들어서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기술 개발 속도도 빨라질 전망이다. 과거에는 새로운 장비 확인을 위해 직접 해외 반도체 장비사를 찾아가야 했고, R&D 인력들이 국가를 오가며 협업해야 해 효율이 낮았다. 국내 R&D센터가 생기면 제조사와 장비사 간의 즉각적인 대응이 가능해져 발빠르게 차세대 기술을 개발하고 공정 최적화 작업도 수월하다.
다만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세계 반도체 장비사 간 파트너십 강화가 국내 장비사에게 부정적일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반도체 장비 국산화율은 20% 수준에 불과해 국내 기업들의 설자리가 더 좁아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일례로 해외 우수 기업의 한국 투자로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되겠지만 국내 반도체 장비사는 인력 이탈이 우려된다.
한국 반도체 산업 발전 측면에서 긍정적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국내 인력이 세계적 기업의 한국 R&D센터에서 일하며 배우는 노하우가 산업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또 국내 부품회사가 장비 부품을 납품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수 있다는 기대도 나온다.
업계 한 관계자는 “과거에도 글로벌 반도체 장비사와 국내 부품사를 이어주는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성과없이 흐지부지 끝났다”며 “실효성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도체 제조사와 정부 등이 관심을 갖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정호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반도체 산업은 기업간 협업이 중요하다”며 “해외 기업의 국내 진출은 긍정적이나 동시에 국산화를 위한 정부의 지원과 투자가 꾸준히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진형 기자 ji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