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 국내 바이오·제약 시장이 뜨겁다. 대기업들이 연이은 바이오·제약 기업 인수합병(M&A)으로 시장에 불을 지피면서 위축된 투자심리 회복 기대감을 높였다. 글로벌 경기침체 여파로 혹한기를 맞고 있는 국내 바이오·제약 시장에서 대형 M&A는 신약 개발을 위한 자금 확보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올해 들어 확대되는 이종산업의 바이오·제약 시장 진출은 성공사례가 많지 않고,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투자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종결합, 대형 자본과 미래 가치의 만남
올해 시작과 함께 OCI그룹과 오리온이 바이오·제약 시장 진출을 선언하며 대형 M&A를 발표했다. OCI그룹은 한미약품그룹과 상호 지분 교환으로 통합을, 오리온은 레고켐바이오사이언스 인수를 선언했다. OCI그룹과 오리온이 이번 M&A에 쏟아부은 자금만 각각 7700억원, 5500억원에 달한다.
이번 M&A는 대기업의 탄탄한 자본력과 신약 개발이라는 미래 가치가 만났다는 점에서 기대감을 높인다.
신약개발은 최소 10년 이상 걸리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이 기간 투자 금액 역시 글로벌 시장에 출시하기까지 전임상, 임상, 인허가, 판매 등에 최소 1조원 이상 투입해야 한다. 신약 개발을 '머니게임'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이런 이유로 바이오·제약사들은 늘 현금에 목말라 있다. 일정 수준 영업이익을 확보해도 신약 개발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연구개발(R&D)에 쏟아부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해 3분기 기준 한미약품 경상 개발비는 400억원으로, 해당 분기 영업이익(575억원)의 70%에 가깝다. 레고켐바이오사이언스 역시 지난해 3분기 200억원의 영업적자를 기록했지만 R&D 비용은 128억원을 투입했다. 반면 두 회사 현금 및 현금성 자산은 1881억원, 736억원으로 급변하는 기술 변화 대응과 장기적인 신약 개발 투자에는 부족한 상황이다.
이들이 이종 영역이지만 대기업과 손잡는 것도 '실탄' 확보가 목적이다. 신약 개발 로드맵을 안정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탄탄한 재정을 갖춘 대기업만 한 파트너가 없다.
OCI와 오리온의 2022년 말 기준 현금성 자산은 각각 1조2460억원, 6100억원 가량이다. 같은 기간 상장 제약사 63곳 중 현금성 자산을 3000억원 이상 보유한 곳이 한 곳도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열악한 자금력을 보완할 막강한 지원군을 구한 셈이다.
반면 OCI와 오리온은 '미래 가치'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 기대를 걸고 있다. 그룹 차원에서 '이종결합'을 처음 시도한 OCI그룹은 태양광 등 신재생 에너지 소재 부문이 주력이다. 갈수록 중국 업체 침투가 가속화되는 등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신성장 동력 확보가 절실한 시점이다.
OCI는 2022년 부광약품을 1461억원에 인수한 데 이어 그룹 내 바이오사업부를 신설하며 신성장 동력으로 바이오·제약을 점찍은 바 있다. 이번에 한미약품그룹과 통합으로 사업 확장에 전환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다. 오리온 역시 제과·식음료 사업을 넘어 글로벌 식품·헬스케어 기업 도약을 선언한 상황에서 레고켐바이오사이언스 인수는 비전 실현을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전유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OCI홀딩스는 이번 거래로 한미약품 그룹 지주사인 한미사이언스 최대주주로 자리 잡으면서 주요 계열사 한미약품, JVM 등까지 편입할 수 있어 제약·바이오 부문에서 종횡의 의미 있는 확장 발판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시너지' 창출 주목…인내심이 관건
OCI와 오리온이 한미약품, 레고켐바이오사이언스를 선택한 것은 탄탄한 신약 파이프라인과 함께 글로벌 시장에 기술수출(라이선스 아웃) 경험이 있다는 점이 작용했다. 한미약품은 2015년부터 사노피, 제넨텍, 로슈 등 글로벌 제약사에 수조원대 기술이전 계약을 체결했다. 레고켐바이오사이언스 역시 지난해 미국 얀센바이오테크에 2조원대 기술이전에 성공했다. 시장 검증을 마친 기업인만큼 투자 불확실성을 최소화했지만 장기적으로 이종결합이 성공할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허 보장과 원가 대비 높은 이익률 등 매력적인 시장이지만 삼성·SK·LG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기업조차 수십 년을 투자해 이제 막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OCI와 오리온 역시 상당한 기간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분석이다.
대표적인 대기업의 바이오·제약 진출 사례로 꼽히는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신약 개발이 아닌 의약품 위탁생산을 주업으로 한다. 사실상 제조업에 가깝다. SK바이오사이언스, LG화학은 코로나19 백신 개발과 신약 후보물질 기술이전 등 일부 성과를 보였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바이오·제약 사업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은 오히려 실패를 부를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산업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장기 투자 여력, 경영진 인내심 등이 받쳐주지 못해 실패한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CJ는 1984년 유풍제약, 2006년 한일약품을 인수한 뒤 2014년 독립법인인 CJ헬스케어로 분리했다. 이후 4년 만에 한국콜마에 매각하며 사업을 접었다. 한화그룹도 2004년 에이치팜을 인수한 뒤 드림파마로 사명을 변경, 의약품 시장에 뛰어들었다. 이 역시 10년 만인 2014년 보유 지분 전부를 미국 제약사 알보젠에 매각했다. 2013년 아모레퍼시픽도 태평양제약을 인수했다 한독에 다시 넘기는 등 쓴맛을 본 대기업도 많다.
바이오 업계 관계자는 “단순히 시장 성장 가능성만 보고 바이오·제약을 인수하는 것은 위험 요소가 너무 많다”며 “신약개발 과정에 드는 시간과 비용은 물론 개발에 성공하더라도 시장 변화로 가치가 떨어지는 등 변수가 많아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용철 기자 jungyc@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