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화 강국을 향한 힘찬 출발이었다.
한국전산원(현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 설립이 그렇다. 정부가 1986년 5월 12일 공포한 '전산망보급확장과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이 한국전산원 설립 근거다. 이 법률 13조를 보자. “정부는 전산망에 관련한 전자계산조직 이용기술 개발과 기술 표준화와 전산망 개발 보급을 위한 기술지원과 국가와 공공단체 전산화를 촉진하기 위하여 한국전산원을 설립한다.”
이는 정보화 강국 구현에 대한 정부 의지의 상징이었다.
정부는 그해 6월 2일 한국전산원 설립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장은 오명 체신부 차관(전 과학기술부총리)이 맡았다. 위원은 이진설 경제기획원 예산실장(전 건설부 장관), 박승덕 과학기술처 연구개발조정실장(전 한국표준과학연구원장), 성기수 한국과학기술원(KAIST) 부설 시스템공학센터 소장(전 동명대 총장), 이응효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 부사장(전 데이콤 사장) 등 5명이었다.
설립추진위는 그해 6월 16일 오전 첫 회의를 체신부 회의실에서 열었다. 5명 전원이 참석한 이날 회의에서는 한국전산원 설립 기본방향과 정관, 출연기관 등에 대해 폭넓게 논의했다.
그해 12월 18일. 체신부는 정부 투자기관과 전산 관련 기관 출연금으로 한국전산원을 설립키로 했다고 밝혔다. 이튿날인 12월 19일. 체신부는 이날 체신부 차관실에서 설립추진위원회를 열고 한국전산원 정관과 예산을 확정했다. 체신부는 이날 한국전산원 설립추진(안)도 밝혔다. 한국전산원 주요 업무는 전산망 기술 표준화와 공공전산화 사업 타당성 검토, 감리 등으로 정했다.
한국전산원 임원은 원장과 감사 당연직 이사 등으로 구성키로 했다. 당연직 이사는 체신부 통신정책국장, 과학기술처 기술정책관, 경제기획원 예산심의관, 총무처 행정관리국장, 한국전기통신공사 부사장, 한국데이터통신 사장 등이다.
순조롭던 설립 작업은 초대 원장 인선을 놓고 난관에 부딪쳤다. 정부와 설립추진위원회는 그해 12월 초 김성진 전 과학기술처 장관을 최적임자로 내정했다. 이는 청와대 뜻이기도 했다.
오명 전 과학기술부총리의 말. “당시 국가기간전산망 사업을 속도감 있게 추진하고 이를 감리하려면 이 분야에 대한 지식이 탁월하고 국무위원 못지 않은 경륜과 영향력이 있는 분을 초대 원장으로 모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김 전 장관을 초대 원장으로 추천했습니다.”
김 전 장관은 육군사관핚교 11기로 전두환 대통령과 육사 동기였다. 11기를 수석 입학하고 수석 졸업한 수재로 육군 준장으로 예편했다. 미국에서 기계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국방과학연구소장을 거쳐 체신부 장관과 과학기술처 장관을 역임했다. 당시는 한국과학재단(현 한국연구재단)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그러나 김 전 장관은 초대 원장직을 사양했다. 청와대 경제수석실도 김 전 장관 설득에 나섰다. 육사 23기로 육사 후배인 홍성원 청와대 비서관이 김 전 장관에게 대통령 뜻을 직·간접으로 전했지만 김 전 장관은 여전히 고개를 내저었다.
청와대 당시 경제수석실 관계자의 말. “정부가 추진하는 국가기간망사업을 제대로 관리할 수 있는 최적임자는 김 전 장관뿐이었습니다. 이 사업은 체신부와 과학기술처, 총무처, 국방부, 재무부 등 각 부처로 분산해 있어 이를 종합하고 조정하면서 구심점 역할을 할 인물이 절대 필요했습니다. 군 출신이어서 국방망도 잘 알고 체신부와 과학기술처 장관을 지내 행정망과 교육, 연구망 등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김 전 장관이 원장직을 계속 고사하자 전두환 대통령이 직접 나섰다. 그해 12월 30일. 청와대에서 김 전 장관을 불렀다. 청와대 접견실에서 전 대통령과 김 전 장관은 마주 앉았다. “이번에 설립하는 한국전산원 초대 원장을 맡아주세요. 김 박사가 아니면 누가 이 방대한 국가기간전산망사업을 제대로 감리하고 추진할 수 있겠소.”
대통령의 부탁에 김 전 장관은 더 이상 고사할 수 없었다. “예, 알겠습니다.”
이재우 전 한국인터넷진흥원장의 말. “당시 이대순 체신부 장관이 김 전 장관에게 원장직을 적극 권유했다고 합니다. 김 전 장관은 자신이 원장직을 맡아야 할지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한 건 사실입니다. 막판에 국가 미래와 한국 정보화에 한국전산원 역할이 중대하다고 판단해 원장직을 수락했다고 들었습니다.”
한국전산원 설립은 이후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그해 12월 30일 체신부는 한국전산원 설립을 허가했다. 이어 한국전산원 설립에 관한 모든 실무를 담당할 5명의 설립반을 구성키로 했다. 추진위원회가 큰 틀에서 전산원 업무 등을 정리했지만 인력과 조직 등 구체안은 백지상태였다. 설립반 구성은 김성진 원장에게 일임했다. 설립반은 산업계 1명, 연구계 1명, 학계 1명 군과 관계 1명, 실무기관 1명 등으로 정했다.
가장 시급한 일은 한국전산원의 틀을 마련할 기획능력자를 뽑는 일이었다.
김 원장은 1987년 1월 1일 새해 첫날인데도 이재우 국방과학연구소 군사연구위원을 만났다. “한국전산원에서 나와 같이 일을 합시다.”
이재우 연구위원은 공군사관학교를 5기로 종업하고 전투비행단장과 공군군수사령관을 역임한 예비역 공군 소장 출신이다. 김 원장은 이 위원의 기획능력이 탁월함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위원은 김 원장의 권유를 흔쾌히 승락했다.
김 원장은 이어 성기수 소장 추천을 받아 이기식 박사와 신동필 박사, 업계에서 최완일, 김재업씨 등을 설립반원으로 발탁했다. 이들은 전산과 감리 등 해당 분야 최고 인재였다.
설립반은 1987년 1월 4일부터 강남구 신사동에 있던 통신정책연구소(현 정보통신정책연구원) 5층에 사무실을 빌려 구체적인 전산원 규정안과 사업계획 수립 등에 착수했다. 이들은 전산원 사업계획과 전산망 표준화, 전산망 감리계획, 조직운영 계획 등에 관해 업무를 분담해 실무작업을 진행했다.
체신부는 1987년 1월 8일자 관보(제10530호)에 체신부 공고 제1호로 한국전산원 특별법인 설립을 공고했다. 그해 1월 13일 김 원장과 설립반 5명은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1박 2일 합숙을 하며 전산원 운영 목표와 사업계획 등을 최종 확정했다. 한국전산원은 그해 1월 16일 김철환사법사무소를 통해 설립등기를 하고 1월 29일 사업자 등록까지 끝냈다. 숨가쁜 나날이었다.
그해 1월 30일. 한국전산원은 이날 오전 서울 종로구 적선동 현대빌딩 6층에서 개원식을 열고 한국 정보화를 선도하는 중추 기관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개원식에는 이대순 체신부 장관과 오명 체신부 차관, 경상현 한국전자통신연구소장(전 정보통신부 장관), 성기수 시스템공학센터 소장, 이응효 한국전기통신공사 부사장 등 각계인사 50여 명이 참석했다.
김 원장은 인사말을 통해 “한국이 정보화사회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신뢰성 높은 통신망과 우수한 기술능력, 전문가 집단 등이 고부가 지식을 결집해야 한다”면서 “전산원은 국가정보화 구현의 중추 역할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한국전산원은 출범 후 정보화 강국을 설계하고 이를 견인했다. 그동안 국가가긴전산망과 초고속 국가망 사업, 전자정부 구축, 정보통신 정책 지원과 세계 최초 U코리아 기본계획 수립 등을 지원했다.
1998년 박성득 원장(한국해킹보안협회 이사장. 전 정보통신부 차관) 시절에는 Y2K종합지원센터를 개소해 운영했다. 2000년대 들어 전자정부 구축 전담기관으로 전자정부 11대 과제와 전자정부 로드맵 31대 과제를 추진했다. 2006년 김창곤 원장(전 정보통신부 차관) 시절 한국전산원을 한국정보사회진흥원으로 명칭을 개정했다. 이어 2009년 한국정보문화진흥원과 통합해 한국정보화진흥원으로 출범했다. 2014년 유엔 전자정부평가에서 3회 연속 세계 1위를 차지했다. 2020년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으로 다시 명칭을 바꿨다. 현재 원장은 황종성 박사다. 그는 1995년 한국전산원에 입사해 연구위원과 빅데이터전략센터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NIA는 지난 1월 15일 국내 최고 인공지능(AI) 전문기관으로 재도약하기 위해 대폭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이와 함께 디지털플랫폼정부 전략 수립도 지원하고 있다. NIA는 한국 정보화 비상(飛上)의 든든한 도약대였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