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에즈 운하는 지중해에서 홍해를 거쳐 인도양으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다. 평균 수심 22m, 폭 200m 정도로, 얕고 좁아서 대형 화물선이 지나가려면 바짝 긴장해야 하는 코스다. 21세기 들어 선박이 초대형으로 커지면서 수에즈 운하에 좌초 사고가 잦아지기 시작했다. 2004년 '트로픽 브릴리언스'가 좌초해 3일 동안, 2016년 '뉴카테리나'가 암초에 부딪혀 12일 동안, 다른 선박의 운항을 막기도 했다.
우려하던 초대형 사고가 터졌다. 2021년 길이 400m짜리 컨테이너선 '에버기븐'이 암초에 올라탄 뒤 빙글 돌면서 운하를 6일간 가로막아 버렸다. 1869년 개통한 뒤, 좌초 사고로 양방향 통행이 막힌 건 처음이다. 이 사고로 선박 369척이 운하에서 발목이 잡히는 바람에 원유 가격이 급등했다. 세계 컨테이너 물동량의 30%가 흐르는 운하가 막히면서 제때 원료나 제품을 공급받지 못해 수많은 제품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이집트는 선주에게 9억달러가 넘는 배상금을 청구했다.
의약품 임상시험은 안전하고 효과있는 의약품을 환자에게 제공하기 위해 매우 까다롭게 설계한 좁은 길목이다. 후보물질에 대한 안전성과 유효성을 검증하기 위해 전임상단계부터 1상→2상→3상→4상을 거쳐 시판에 이르는 지난하고 지루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후보물질이 신약으로 태어나기까지 적어도 10년 이상의 시간과, 10억달러 이상의 예산을 투자할 각오를 해야 한다. 각 단계를 거칠 때마다, 어쩌면 수에즈 운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긴장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잘못 설계하거나 진행한 임상시험이 일으킨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1950년대에 임산부의 입덧 치료제로 사용된 탈리도마이드는 세계 46개국에서 1만명이 넘는 태아를 기형으로 만들었다. 2006년 영국에서 백혈병 치료 후보물질(TGN1412) 임상시험에 참가한 6명은 면역계 이상으로 바로 중태에 빠졌고, 10년 뒤 프랑스에서 불안장애 치료 후보물질(BIA 10-2474) 임상시험에서도 1명이 죽고 5명이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대형사고는 천재(天災)와 인재(人災)가 우연히, 그리고 어이없이 겹치면서 생기기 마련이다. 사고 당시 수에즈 운하에서 '에버기븐'은 시속 70km가 넘는 심한 모래폭풍으로 키를 가누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선장은 12분 동안 8번이나 뱃머리를 바꿨다. 좁은 운하에서 선박의 방향과 속도를 조절하는 이집트 도선사(導船士) 2명이 다투면서 서로 다른 지시를 내려 우왕좌왕 한 것도 큰 빌미가 됐다.
의약품 사고도 마찬가지다. 탈리도마이드는 임산부와 태아에 대한 임상시험은 하지 않고, 동물실험만 거친 뒤 의사의 처방이 없어도 살 수 있도록 한 것에서 비극이 시작됐다. 또 부작용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하는 바람에 5년 뒤에야 부작용이 처음 보고된 것도 문제다. 다른 사건들도 후보물질의 안전성과 유효성을 평가하는 과정에 필요한, 임상시험 프로토콜 설계, 참가자 선정과 동의, 약물 투여 양과 모니터링 등에 대한 무지와 소홀로 빚어진 것이다.
'에버기븐' 사건을 겪은 뒤 수에즈운하 관리청은 항로의 안전성을 높이고, 통행절차를 강화하며, 선박 운항지침과 긴급대응시스템을 개선했다. 숱한 인명 사고를 겪으면서 의약품 임상시험도 갈수록 까다로워지고 있다. 의약품 산업에서 규제가 점점 촘촘하고 엄격해지는 것이다. 특히 2006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과학적인 역량이 부족해 규제를 충실하게 수행하지 못했다고 반성하면서, 최근 '규제과학'(Regulatory Science)이 새로운 영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바이오헬스 분야에서 정부의 연구개발 투자는 '보물섬'을 찾는 '보물지도'를 만드는 것이다. 보물지도를 그릴 '항해사'도 훈련해야 하지만, '탐사선'에 올라탈 선장(CEO)과 기관장(CTO)과 갑판장(COO)을 비롯한 도선사(CRO, CRC 등)도 양성해야 한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산실 스탠퍼드대가 운영하는 '바이오디자인'(BioDesign) 같은 글로벌 차원의 혁신적인 교육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인력을 길러내고 생태계를 이뤄나가야 한다.
허두영 한국디지털웰니스협회 이사 huhh2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