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한 시기에 대한 명명이 필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 현실을 적확하게 포착하기 위해서다. 두 번째 긍정적 가능성을 표현할 수 있는 수사(修辭)를 통해 산업의 미래가치를 높이고 주목도를 높이기 위함이다. 세 번째 지나온 시기를 사후적으로 냉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다.
필자는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았던 2019년 말에서 2020년 초에 '스트리밍 이후의 플랫폼(스리체어스)'이라는 책을 냈는데 당시 '스트리밍'이라는 표현을 편집부에서 선택했던 이유는 아마도 두 번째 이유와 관련되어 있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OTT의 혁신성이 주목받았고, OTT가 전체 영상산업의 성장을 견인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팽배했다. '스트리밍 전쟁'이라는 용어에는 말 그대로 경쟁이 심화될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영상산업의 규모가 유의미하게 성장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반영돼 있었다.
2022년에 출간됐고, 2023년에 번역돼 국내에 소개된 데이트 헤이스와 돈 흐미엘레프스키의 '스트리밍 이후의 세계(알키, 이정민 옮김)'는 OTT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의 열기가 식은 다음 OTT 등장 이후 영상 생태계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조망한 책이다. 이 책의 원제는 'Binge Times'다. binge는 몰아보기를 뜻하는 'binge watching' 때문에 친숙한 용어지만 폭음, 폭식과 같은 부정적인 뜻도 가지고 있는 용어다. 저자들이 'Binge Times'라는 제목을 선택한 것은 OTT가 콘텐츠 제작비를 포함한 다양한 투자가 수반되어야 하는 산업이기 때문이었겠지만, 필자에게 'Binge Times'라는 제목은 코로나 전후의 몇 년 동안 OTT에 대한 기대와 담론이 과잉이었다는 것을 환기해준다. OTT 성장에 대한 과거의 기대감에서 확인되는 것은 영상산업이 다른 산업보다 많은 관심을 받는 분야라는 것이다. 영상산업이 산업적 가치를 넘어서는 관심을 받는 이유는 이용자들의 마음에 영향을 주는 산업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대한민국에서는 국가적 위상을 높이는데 영상산업이 크게 기여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대한민국에서 영상산업이 진흥의 대상이 되는 이유다. 코로나 전후의 영상산업을 '스트리밍'으로 규정할 수 있었다면 스트리밍 이후 영상산업의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제 가입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시기는 지나갔고, 혁신을 표방했던 OTT 사업자들은 광고요금제를 도입하고 요금을 인상하면서 수익성 추구에 집중하고 있다. OTT 등장 이후 영상산업은 비가역적인 변화를 경험하고 있으며, 레거시 영상 매체들뿐 아니라 OTT도 조기에 성숙기에 진입했다. 지금은 OTT를 포함하여 영상산업의 변화에 영향을 준 변수들을 검토하면서 이후의 단계를 준비해야 할 때다.
OTT 산업에 대한 관심에 가려져 있는 것은 국내 레거시 영상매체들이 지금까지 국내 미디어·콘텐츠 산업 전반에 다양한 측면에서 기여해 왔다는 것이다. 국내 영상산업은 콘텐츠 산업, 유료방송, 영화산업 등 관련된 분야들이 상호 시너지를 창출하며 공동발전해 왔다. 콘텐츠 산업은 그 어느 국가보다도 자국 콘텐츠를 선호하는 이용자의 충성도를 형성시켰다. 콘텐츠 산업의 이와 같은 기여는 디즈니와 같은 글로벌 사업자라 하더라도 국내에서 콘텐츠를 제작해서 확보하지 않으면 국내 OTT 시장에서 경쟁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유료방송은 설비투자를 비롯한 여러 가지 제약요건에도 합리적인 요금으로 이용자들이 다양한 콘텐츠와 채널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영화산업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작품을 꾸준히 제작해 인구수 대비 가장 많은 관객이 극장을 찾는 환경을 조성했을 뿐 아니라 드라마 등 다른 장르의 제작인력 수급에도 기여했다. 하지만 방송산업은 전체적으로 침체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고, 영화산업은 극장 관객 수의 급락으로 향후 투자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이다. 이와 같은 레거시 영상매체들의 위기는 레거시의 쇠락만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과 같이 영상매체들의 어려움이 지속된다면 강건했던 국내 영상산업의 제반 환경이 무너져 OTT와 같은 디지털 플랫폼 매체의 성장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
영상산업은 성장해야 하는가? 적어도 대한민국에 국한해서 보자면 그렇다고 생각한다. 국내 콘텐츠 산업은 특수한 가치를 지니고 있고, 이와 같은 특수성은 미디어 산업 분야를 넘어서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간과되지 말아야 할 부분은 자국 콘텐츠를 그 어느 국가보다도 좋아하는 대한민국 국민이 영상산업의 위축으로 인해 갈수록 좋은 국내 콘텐츠를 접하기 어려워진다면 이는 국민 복지 측면에서도 부정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글로벌한 위상을 확보한 콘텐츠 산업의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 놓인 과제는 레거시 영상산업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면서 OTT 산업을 질적으로 도약시키는 것이다.
OTT의 등장으로 극적인 변화를 겪었던 시기는 이제 위기의 국면이 지속되는 양상으로 전환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국면이 열릴 것이라는 기대감보다는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는 절실함 속에서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시기다.
노창희 디지털산업정책연구소 소장 nch0209@naver.com
〈필자〉노창희는 디지털산업정책연구소에서 소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OTT에 대해 산업적인 측면과 문화적인 측면 등 다각적인 차원에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스트리밍 이후의 플랫폼' 'OTT 트렌드' '코로나19 이후의 한류' 등의 책을 썼다. 한국 OTT포럼의 연구이사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