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극재에 흑연을 쓰지 않고 실리콘 소재만 사용하는 '퓨어실리콘' 배터리 시대가 가시권에 들어섰다. 전기차는 물론 모바일 기기 배터리 사용에 혁신을 몰고 올 퓨어실리콘 개발이 상당 수준으로 진척돼 상용화 막바지에 이른 것으로 파악됐다.
12일 업계에 따르면 북미 대형 IT 업체가 음극에 흑연을 쓰지 않고 실리콘 100%인 일명 퓨어실리콘 배터리 적용을 추진 중이다. 이 회사는 이르면 내년부터 이어폰 등 일부 제품에 퓨어실리콘 배터리를 탑재하고 순차적으로 다른 기기까지 확대할 방침이다.
이 사안에 정통한 업계 관계자는 “한 번 충전으로 모바일 기기 사용 시간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동시에 새로운 모바일 경험을 제시하기 위해 퓨어실리콘 배터리를 개발 중인 것으로 안다”며 “용량, 충전시간, 수명 등을 테스트하는 개발 마지막 단계까지 왔다”고 전했다.
배터리는 크게 양극재와 음극재로 구성된다. 양극재는 주로 배터리 용량과 출력을 결정하고, 음극재는 충전시간 및 수명과 연관 깊다.
현재 음극재의 주 원료는 흑연이다. 흑연은 저렴하지만 에너지를 담는 데 한계가 있다. 더 오래, 더 많은 배터리를 써야 하는 전기차나 모바일 기기 개선이 제한적이다.
대안으로 나온 것이 실리콘이다. 실리콘은 이론적으로 흑연 대비 10배 더 많은 리튬을 저장할 수 있다. 실리콘 함량이 늘어나면 늘어날 수록 배터리 사용 시간이 증가하고 충전 시간도 단축된다.
하지만 실리콘은 충·방전 과정에서 부피가 최대 400%까지 팽창할 수 있는 게 단점이다. 실리콘이 팽창하면 균열이 생기고 배터리 성능 저하로 이어진다. 에너지밀도 상승과 충전시간 단축 등 장점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5% 수준의 소량 첨가하는 방식이 사용돼왔던 이유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기술적 한계를 극복해 실리콘 비중을 높이는 방향으로 기술 개발을 진행해왔는데 이제는 흑연을 완전 대체하는 퓨어실리콘 배터리 상용화 직전까지 왔다는 설명이다.
배터리 업계 고위 관계자는 “퓨어실리콘은 상용화가 되면 전지 역사를 바꿀 기술”이라며 “혁신이 일어날 것”이라고 평가했다.
세계 최대 전기차 업체인 테슬라 역시 흑연을 쓰지 않는 실리콘 음극재를 적용한 배터리 개발에 진척을 이룬 것으로 전해졌다.
테슬라는 지난 2020년 자체 행사에서 차세대 음극 소재로 '테슬라 실리콘'이라는 개념을 처음 소개했다. 실리콘 탄소 복합체(SiC)나 실리콘 산화물(SiOx), 실리콘 나노와이어 등은 생산 공정이 복잡하고 가격이 비싸다면서 순수 실리콘에 탄성 전도성 폴리머를 코팅한 소재를 구상하고 있다고 전했다.
업계에 따르면 테슬라는 실리콘 100%로 구성된 음극재 배터리 개발이 목표로, 현재 관련 소재 업체와 배터리 제조사들이 연구실 단위 개발 단계를 완료하고 파일럿 개발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르면 내년 말부터 배터리 양산이 시작될 전망이다.
이 사안에 밝은 업계 관계자는 “테슬라가 2019년 파나소닉과 LG에너지솔루션 등 배터리 협력사에 테슬라 실리콘 개념을 소개하면서 각 기업들이 관련 소재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면서 “흑연 없이 실리콘을 단독활물질로 사용한 음극재로 정밀한 충전상태(SoC) 제어를 통해 실리콘 팽창을 억제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정현정 기자 ia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