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정의 이슈탐색] 에스파, ‘멀티 유니버스’로 광야의 제약에서 벗어나다

‘Licorice’ 트랙비디오 한장면, 사진=SM엔터테인먼트
‘Licorice’ 트랙비디오 한장면, 사진=SM엔터테인먼트

<‘민트초코 괴물’이 나타나 사람들을 쓰러트리고 다닌다. 민초괴물을 막기 위해 슈퍼전대 히어로 핑크, 블루, 퍼플, 레드가 출동한다. 민초괴물은 사실 핑크, 블루, 퍼플, 레드가 버린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에서 태어난 괴물.

격렬한 싸움 끝에 핑크, 블루, 퍼플, 레드는 필살기 초전자포를 쏴 민초괴물을 쓰러트린다. 하지만 방심한 순간 민초괴물은 회심의 민초빔을 쏴 반격하고 핑크, 블루, 퍼플, 레드는 모두 정신을 잃는다.



핑크, 블루, 퍼플, 레드는 어딘가의 집안에서 깨어나고, 그곳에서 민초괴물은 갑자기 이들을 위해 음식을 차려준다. 음식은 당연히 모두 민트초코.

호기심에 민트초코를 한 입씩 먹기 시작한 핑크, 블루, 퍼플, 레드는 민트초코의 맛에 눈을 뜨고, 자신들의 로고까지 민트초코로 바꿔버리는 열혈 민초단이 된다.>

이 정신이 아득해지는 스토리는 어느 싸구려 B급 전대물의 이야기가 아니다. 무려 4세대 걸그룹 3대장으로 꼽히는 에스파(aespa – 카리나, 윈터, 지젤, 닝닝)의 ‘Licorice(리코리쉬)’ 트랙비디오의 실제 내용이다.

트랙비디오의 특이함은 ‘Licorice’뿐만이 아니다. 이보다 하루 앞서 공개된 ‘Long Chat(#♥)(롱 챗)’에서 에스파 멤버들은 ‘팝콘별’을 옥수수로 키워 다시 우주로 돌려보내는 괴짜 과학자로 변신했고, ‘Supernova(슈퍼노바)’에서는 마치 엑스맨처럼 초능력에 각성한 뮤턴트로 등장한다. 그런가하면 가장 최근에 공개된 ‘Live My Life(라이브 마이 라이프)’에서는 다시 자유분방한 90년대 철없는 소녀들로 분해 전작들과는 전혀 다른 매력을 발산한다.

그리고 이 물음표가 여러 개 떠오를만한 엉뚱하고 혼란스러운 영상들은 희한하게도 사람을 잡아끌고 있다.

실제로 ‘Supernova’는 유튜브 인기 급상승 음악 1위에 올랐고, ‘Long Chat(#♥)’과 ‘Licorice’도 각각 조회수 190만 회와 154만 회를 기록하며 순항 중이다. 또 17일 공개된 또‘Live My Life’ 역시 공개 14시간 만에 약 64만 회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에스파의 이런 일련의 뮤직비디오를 가장 잘 설명하는 키워드는 ‘키치’(Kitsch)다.

일반적으로 키치라고 하면 ‘아기자기하고 세련된’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지만, 좀 더 정확히 키치는 B급을 A급인 것처럼 포장하는 개념이다. 즉, 흔히 말하는 병맛 코드나 B급 싸구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효과들, 트렌드에서 멀어진 촌스러운 것들을 뻔뻔하게 고급스러운 것이라고 포장하는 게 바로 키치의 묘미이자 미학이다.

그리고 에스파의 일련의 뮤직비디오는 이 키치의 개념에 정확하게 들어맞고 있다. 이러한 키치함이 바로 에스파의 뮤직비디오에 사람들이 관심을 느끼고 호감을 보내는 가장 큰 이유로 보인다.

‘Long Chat(#♥)’ 이미지, 사진=SM엔터테인먼트
‘Long Chat(#♥)’ 이미지, 사진=SM엔터테인먼트

물론 에스파는 과거에도 독특한 시도를 많이 한 그룹이다. 데뷔 당시 각각의 가상 아바타와 함께 ‘메타버스 걸그룹’을 표방한 것도 그렇고, ‘광야’를 찾아 헤매거나 ‘블랙맘바’와 대결을 펼치는 등 평범하지 않은 세계관과 콘셉트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다만 세계관의 특성상 잔뜩 힘을 주고 멋을 부리던 과거의 콘셉트보다 키치함이 더해진 지금의 콘셉트가 에스파 멤버에게도 훨씬 편안하고 어울리는 모양새다.

닝닝이 ‘Supernova’ 공개 이후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웃기다고 했지??’라는 글을 남기거나, 윈터가 ‘Licorice’ 트랙비디오 공개 이후 ‘킹받지’라는 글을 남기며 이를 즐기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또한 에스파의 이런 시도는 세계관적으로도 흥미롭다. 지금까지 공개된 트랙비디오는 기존 에스파 세계관의 폐기가 아니라, 각각 ‘Universe’(유니버스)를 붙임으로써 ‘멀티 유니버스’로 확장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에스파는 기존 세계관과의 충돌을 막으면서도 새롭고 다채로운 에스파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 성공했다.

즉, 에스파 특유의 ‘쇠맛’ 질감은 유지하면서도 음악과 콘셉트, 퍼포먼스에 대한 제약을 해제하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셈이다.

첫 정규앨범 ‘Armageddon(아마겟돈)’의 발매를 앞두고 SM엔터테인먼트와 에스파가 쏟아부은 기획력에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에스파의 이런 독특한 세계관 확장 시도는 팬이 아닌 일반 리스너에게도 신선하게 다가가고 있다. 조회수를 넘어 매 뮤직비디오가 공개될 때마다 각종 커뮤니티에서 화제를 모으며 주목을 끌었고, 반응 역시 ‘재미있다’는 평이 압도적으로 앞서고 있다.

게다가 혹시 에스파의 키치함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취향에 맞는 콘셉트가 아니더라도 실망하긴 이르다.

만약 첫 정규앨범 ‘Armageddon’에 수록된 모든 곡에 새로운 ‘유니버스’를 보여준다면, 에스파에게는 앞으로도 보여줄 유니버스가 6개나 더 남아있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에스파식 ‘어떤 걸 좋아할지 몰라 다 준비했어’의 결정체가 바로 ‘Armageddon’인 셈이다.

‘Live My Life’ 트랙이미지, 사진=SM엔터테인먼트
‘Live My Life’ 트랙이미지, 사진=SM엔터테인먼트

이처럼 에스파는 매우 영리하고 유쾌하게 광야의 제약을 풀어냈다. 그 덕에 에스파는 앞으로도 마음껏 새로운 콘셉트를 시도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게 됐다. ‘Armageddon’으로 시작되는 새로운 에스파의 새로운 세계에 기대가 모이는 이유다.

전자신문인터넷 최현정 기자 (laugardag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