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1월 1일부터 모든 금융거래에 대해 실명거래를 실시하겠습니다.”
1982년 7월 3일. 강경식 재무부 장관(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이날 “내년부터 개인은 주민등록증, 법인은 사업자 등록증에 의해 실명거래제를 실시키로 했다”면서 “실명화 과정에서 출처가 불분명한 자금에 대해 1인당 3000만원 이하 등 일정 조건을 제외하고는 5% 과징금을 물리고 양성화하겠다”고 밝혔다. 세상을 깜작 놀라게 한 이른바 '7·3 조치' 발표였다. 지하경제를 양성화해 제2 경제도약을 이룩하겠다는 정부의 강력한 정책 의지를 담고 있었다.
언론들은 이를 '경제혁명'이라고 평가했다. 그만큼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발표 하루 전날. 강 장관이 한국과학기술연구소(KAIST) 부설 전산개발센터 성기수 소장(전 동명대 총장)에게 전화를 했다. 성 소장은 한국 컴퓨터산업의 대부로 불렸다. 두 사람은 1970년 경제기획원 예산업무 전산화를 추진할 때부터 인연을 맺고 있었다. 당시 강 장관은 경제기획원 예산총괄과장이었다. 그는 국내 처음 예산업무 전산화를 제안했다.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구상이었다. 두 사람 관계는 예산업무 전산화를 마무리하는 1970년대 말까지 지속됐다.
△강 장관:종합과세를 위한 국민 금융소득 데이터베이스가 우리 기술로 가능합니까?
△성 소장: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강 장관:시일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연내 완료 가능합니까?.
△성 소장:연간 발생하는 기본 데이터는 몇 건이며 컴퓨터로 기록한 것은 얼마나 됩니까?
△강 장관:모두 5000만건 정도인데 컴퓨터로 입력한 것은 대략 2000만건 정도입니다.
△성 소장:서류가 3000만건 정도라면 발생 당해 연도에 전산 입력할 수 있습니다.
△강 장관:내년부터 전산시스템을 이용해 모든 국민에게 종합과세가 가능합니까?
△성 소장:충분합니다.
성기수 박사의 회고. “그날 강 장관과 통화에서 나는 기술상 아무 문제가 없다”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이 일은 정권 명운이 달린 일이었다. 청와대에서는 김재익 경제수석이 이를 적극 지지했다.
재무부는 그해 7월 5일. 재무부 회의실에서 강경식 장관 주재로 성기수 소장을 초청해 실명제 실시를 위한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국내 은행과 보험회사, 증권회사, 종합금융회사 대표 등이 모두 참석했다. 회의에서는 실명제 도입을 놓고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이날 금융실명제 실시에 따른 전산시스템은 전산개발센터가 개발키로 했다.
이튿날인 7월 6일 재무부는 김홍기 차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금융실명거래전산화추진위원회를 출범했다. 위원장 아래 이진설 재무부 제2 차관보와 성기수 소장을 책임자로 하는 종합기획소위원회와 연구개발소위원회를 두고 이를 지원할 행정지원소위원회도 설치했다. 종합기획소위에는 강현욱 재무부 이재국장과 안공혁 증권보험국장, 백원구 세제국장, 이상혁 국세청 자료관리관 등과 이단형 전산개발센터 선임연구원(한국소프트웨어기술진흥협회장)이 참여했다.
그해 7월 14일. 강경식 장관은 국회 경제과학위원회(이하 경과위에 나가 “전산개발센터가 금융실명 전산시스템을 개발할 수 있으며 1983년 1월 1일부터 금융실명제 실시가 가능하다”고 답변했다. 성기수 소장도 야당 의원들의 질의에 “가능하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러나 이정오 과학기술처 장관은 “전산 처리가 가능하겠느냐”는 여당 의원들 질의에 “준비가 미흡하다”고 답변했다. 과학기술 주무 장관은 “준비가 미흡하다”고 했는데 재무부 장관은 “가능하다”고 답변하는 희한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를 언론이 크게 보도하자 난리가 났다.
이튿날 청와대에서 강경식 장관과 성기수 소장을 함께 호출했다.
청와대 소접견실. 긴 탁자 끝에 전두환 대통령이 앉고 왼쪽에 김재익 경제수석, 그리고 오른쪽에 강경식 장관과 성기수 소장이 자리를 잡았다.
전 대통령이 성기수 소장을 보며 말했다. “금융기관들이 도입한 컴퓨터가 달라서 국세청 컴퓨터가 이를 읽지 못한다는데 어떻게 내년 1월 1일부터 금융실명거래를 할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기술상 금융실명제가 불가능하다는 데 성 소장만 가능하다고 합니까.”
“은행 컴퓨터는 IBM이고 국세청 컴퓨터는 CDC로 서로 다릅니다. 하지만 데이터 규격만 맞춰주면 처리가 가능합니다. 이미 전산센터는 지난 1970년부터 이런 작업들을 많이 해 왔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보는 강 장관과 김재익 수석은 내심 조마조마했다. 성 소장은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며 기술에 문제가 없는 이유를 소상히 설명했다.
전 대통령이 다시 물었다. “은행과 국세청 컴퓨터를 단일 기종으로 한 뒤 금융실명제를 해야 한다고 다수 과학자들이 말을 하던데”
“각하. 공공기관 컴퓨터를 한 기종으로 통일하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그럼 무슨 수로 수천만건의 금융거래 자료를 처리합니까?”“전산센터는 500만건에 가까운 대입 예비고사 채점도 10일 만에 끝냈습니다.”
전 대통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지시했다. “예정대로 금융실명제를 내년 1월 1일부터 시행토록 하시오.”
그해 7월 17일.
성기수 소장은 재무부 기자실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강경식 장관의 부탁이었다. 기자들과 일문일답에서 성 소장은 “우리 능력으로 실명화 작업을 무리없이 추진할 수 있다”면서 “전산화로 국민이 번거럽거나 귀찮은 일은 없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밝혔다.
성 소장은 전산화 작업 일정에 대한 질문에 “7월부터 입력해 10월 말 시험가동에 나선다”면서 “내년 1월 실시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답변했다.
그해 9월 4일. 재무부는 금융실명거래에 관한 법률안을 마련, 확정했다.
그러나 정치권의 입장은 정부와 달랐다. 여당인 민정당조차 금융실명제 실시에 반대했다.
그해 10월 26일 열린 국회 경과위서 여야 의원들은 실명거래제를 대폭 보완하거나 시기를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경식 장관은 “내년 1월 1일부터 시행해야 한다”고 맞섰다.
그해 11월 23일 국회 경과위에서 성기수 소장을 불러 금융실명제 전산화에 대해 질의했다.
성 소장은 김종하 의원이 “우리보다 앞선 일본은 왜 실명제를 연기했느냐”고 묻자 “일본은 주민등록번호가 없어 우리와 다르다”며 “금융 전산화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답변했다.
금융실명제 실시를 앞두고 정치권은 강력 반대했다. 그동안 강 장관 입장에 섰던 여당 인사들조차 반대편에 가세했다.
그해 10월 29일. 중앙청 회의실에서 당정 정책협의회의가 열렸다. 이날 회의에서 당정은 국회 심의 과정에서 실명제거래에 관한 법률안을 보완키로 했다. 강 장관에게는 매우 힘들고 긴 하루였다.
민정당은 11월 23일 실명거래제를 오는 1986년 이후 실시하되 그 시기 결정은 대통령에게 위임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금융실거래 법안 수정안을 정순덕 위원 등 156명의 이름으로 국회에 제출했다.
이 법안은 그해 12월 16일 정기 국회를 통과했다. 여야가 통과시킨 법안은 “실시 시기는 전산화 등 행정 준비 상황과 경제 여건을 감안해 1986년 1월 1일 이후 '대통령이 정하는 날로부터 시행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이런 가운데 전산개발센터는 정부에서 30억원의 개발비를 지원받아 1982년 말까지 금융실명거래용 전산시스템을 개발했다.
정부는 그해 12월 31일 11조 부칙의 금융실명거래에 관한 법률을 법률 제3607호로 공포했다.
하지만 금융실명제는 1986년 1월부터 시행하지 못했다. 정치권에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시행일을 계속 미룬 까닭이다.
강경식 전 장관의 증언. “금융실명제가 당초 구상대로 1983년부터 시행했더라면 기업경영과 사회 부조리도 크게 줄어들었을 것이다.”(국가가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
이 법은 노태우 정부를 지나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3년 8월 12일 전격 실시했다.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한 관계로 혼란은 없었다. 대신 금융실명거래라는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과학기술이 만든 미래였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