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파 방송 시사교양 프로그램에서 13년 전 살인사건을 재조명하며 범죄 원인을 '게임'으로 지목해 여론이 들끓고 있다. 국민 70% 이상이 즐기는 대표적 여가 및 문화활동으로 게임이 자리잡았음에도 '중독'이라는 프레임을 형성하며 부정적 인식을 확산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13일 업계에 따르면 KBS 2TV를 통해 방영 중인 '스모킹 건'은 최근 '만삭 아내 살해 사건'을 다루며 남편이 아내를 죽인 이유로 '현실의 삶을 게임처럼 리셋하고 싶어서'라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소견을 전면에 내세웠다.
방송에서는 범인으로 밝혀진 남편이 전문의 시험을 준비하며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라고 언급한 이후 사건의 '스모킹 건'(결정적 증거)으로 평소 게임을 즐겨왔다는 점이 부각됐다. 평소 1~2시간 정도 게임을 즐겨왔고, 대학생 때는 하루 8~10시간씩 게임을 했기 때문에 인생을 게임처럼 '리셋'하려 했다는 이유에서다.
방송에 출연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당시 남편이 즐긴 게임은 폭력성이 적은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지만, 인생을 게임처럼 전략적으로 끌고가려는 성향을 가진 것으로 봤다. 게임처럼 현실의 삶도 초기화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주장이다.
이 같은 내용을 접한 대다수 게이머는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공부로 인한 스트레스나 여러 다른 요인은 논외로 둔 채 게임을 범죄와 연결짓는 인식이 게임이 대표적 여가 활동이자 문화생활로 안착한 현대 사회와 괴리가 크다고 꼬집었다.
해당 영상이 KBS 유튜브 채널에 공개되자 하루만에 780여개가 넘는 비판 댓글이 줄을 이었다. 지난해 잇따른 흉기 난동 원인에 대한 수사결과를 검찰이 발표하며 게임 중독이 언급된데 이어 또 다시 '게임 탓'이 수면 위로 부상했다는 지적이다.
게임업체 관계자는 “게임에 대한 성숙해진 사회 인식과 괴리된 관점에 헛웃음만 나온다”며 “급속히 발전하는 게임 산업 속도를 조금도 따라가지 못하는 모습에 깊은 우려가 든다”고 토로했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주로 소속된 한국중독정신의학회는 게임이용장애를 중독으로 정의하고 국내 질병코드로 등록하는 것을 숙원으로 삼았다. 2025년 통계청 한국 표준질병·사인분류(KCD) 개정을 앞두고 관련 사전 여론 형성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반면 게임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는 게임중독 혹은 게임 과몰입을 질병코드로 등록한다는 데 반대한다는 입장이다. 앞서 21대 국회에서도 게임이용장애의 맹목적 질병코드 도입을 방지하기 위한 법안이 발의되기도 했다.
김정태 동양대 게임학부 교수는 “게임과 e스포츠 관련 사안을 국민 정신 건강이라는 프레임으로 규정하려하는 것은 굉장히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며 “건강하게 게임을 즐기는 국민 대다수로부터 외면을 받게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정은 기자 jepark@etnews.com
-
박정은 기자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