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빔밥도 음식인가. 신선하게 재료를 보관할 냉장고가 없었다. 먹다 남은 재료에 식은 밥을 던져 고추장 등 양념으로 짓누른다. 각각의 재료가 가진 고유의 맛은 엉키고 양념 맛에 급하게 먹는다. 만들고 먹는데 시간을 줄이려고 뒤죽박죽 성의 없이 만든 한끼 식사가 아닌가. 정말 그럴까.
요즘 비빔밥을 보자. 야채, 고기 등 비빔밥을 이루는 재료들은 흠잡을 것이 없다. 신선하다. 음양오행을 가리키는 5색 빛깔을 골고루 갖추니 모양도 좋다. 빛깔이 다른 재료마다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 비타민, 무기질 등 영양소가 가득해 건강에도 으뜸이다. 밥은 좋은 쌀로 짓고 밥알의 강도가 적당해 뭉개지거나 딱딱하지 않다. 비빔밥 그릇을 데워 온도를 유지하는 것도 맘에 든다.
적당한 재료들이 강도와 밀도를 달리해 정성껏 뒤섞이는 것이 '비빔'이다. '비빔'은 재료들과 양념의 융·복합을 통해 맛을 극대화한다. 공동체 조직도 '비빔'이 중요하다. 좋은 조직은 인재를 낭비하지 않고 골고루 융·복합해 최상의 성과를 낸다. 각각의 인재를 떼어내어 일을 맡겨도 잘한다. 힘을 합치면 더 큰 시너지를 내고, 따로 떼면 각자의 개성을 올곧이 드러낸다. 자질이 부족한 사람도 이런 조직에선 빠르게 성장한다. 그것이 좋은 조직이다.
비빔밥의 '비빔'에는 고추장, 간장, 된장, 참기름 등 양념을 활용한다. 양념은 어떤 재료를 써서 어떻게 발효하는 지에 따라 비빔밥 맛을 좌우한다. 공동체 조직으로 치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언어, 문자와 플랫폼 같은 역할이다. 양념은 재료들이 각자의 개성을 지키면서도 하나로 똘똘 뭉치게 만든다. 비빔밥을 한 숟갈 입에 넣어 씹다보면 각 재료의 고유한 맛을 잃지 않으면서 이들의 힘을 합해 새로운 맛을 끄집어낸다. 신선한 재료는 언제든 구할 수 있지만 양념은 역사와 전통 없이 불가능하다. 공동체 조직의 '양념'도 마찬가지다. 좋은 인재들을 융·복합해 시너지를 내는 인간촉매와 제도가 없으면 미래가 없다.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이 팀장, 대표 등 리더가 돼야 한다. 리더는 부족한 사람도 일으켜 기회를 주고 성장시킨다. 멋진 리더를 키우는 것은 모방이 아니라 조직의 역사와 전통에서 진화된 DNA다.
식당은 비빔밥을 비빌 수 있는 최적의 상황을 만들고, 마지막 순간에 '비빔'의 역할을 고객에게 과감하게 양보한다. 비빔밥처럼 고객을 생각하는 음식이 있었던가. 개인화를 통해 고객 체험을 극대화한다. 비빔밥은 어떻게 비비는지에 따라 맛이 결정된다. 재료와 밥이 뭉개지는 것이 싫으면 젓가락을 사용해 비빈다. 어떻게 먹을까. 비비기 전에 각 재료를 조금씩 맛본다. 고추장 등 양념도 마찬가지다. 그 다음엔 재료와 밥을 엉성하게 비벼 먹어본다. 그 뒤엔 혼신을 다해 모두 비벼 그릇을 빡빡 긁어 먹는다. '먹음'은 '즐김'이 된다.
철학자 질 들뢰즈의 말을 듣자. 인류발전은 '리좀'이라는 땅속 줄기 식물을 닮았다. 포식자의 눈에 띄지 않는 땅속에서 끊임없이 퍼져 나간다. 돌을 만나면 뚫고 힘들면 돌아간다. 합치고 나뉜다. 끊임없는 '반복'에서 새로운 '차이'를 찾는 일이다. 차이는 언뜻 보기에 오류, 불량일 수 있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삶의 촉매로 만든다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3M의 포스트잇은 강력한 접착제로선 불량이지만 떼었다 붙였다 하는 차이를 발견해 히트상품이 되었다. 비빔밥은 재료, 양념과 비빔에 따라 맛이 다르다. 비빔밥은 하나의 음식이 아니다. 재료, 양념과 '비빔'의 반복에서 차이를 찾아 수백, 수천개의 다른 음식으로 진화한다.
복잡한 과학기술로 얽힌 디지털시대엔 모든 것을 독점하는 독불장군이 있을 수 없다. 반도체만 해도 설계, 디자인, 제조공정 등 세분되어 있고 기업별, 분야별, 공정별 융·복합을 잘해야 차이를 찾아 생존한다. 비빔밥이 보여주는 '비빔'의 창의를 소홀히 할 수 없는 이유다.
이상직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디지털 생활자'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