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134〉기초과학의 뿌리…기초과학연구지원센터 설립

기초과학연구지원센터는 1989년 9월 서울 대치동에 청사를 마련해 이전했다. 사진은 대치동 청사 현판.
 기초과학지원연구원 제공
기초과학연구지원센터는 1989년 9월 서울 대치동에 청사를 마련해 이전했다. 사진은 대치동 청사 현판. 기초과학지원연구원 제공

“올해 기초과학지원센터를 설립하겠습니다.”

6공화국 출범 후 이관 과학기술처 장관은 1988년 4월 12일 노태우 대통령에게 한 첫 업무보고에서 이같이 밝혔다. 노 대통령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학기술처는 이후 기초과학지원센터(현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 설립에 박차를 가했다.

기초과학연구지원센터는 대학이나 연구기관 등에서 독자 재정으로 구입하기 어려운 고가의 연구장비를 정부가 구입해서 설치하고 이를 대학과 연구기관이 활용할 수 있게 한다는 게 설립 목적이었다.

기초과학지원센터 설립은 5공화국 시절인 1986년부터 과학기술처가 추진했다.

당시는 지원센터가 아닌 기초과학연구소였다. 과학기술처는 수학, 물리, 생물, 화학 등 기초과학 분야를 정부 차원에서 집중 연구하는 연구소를 설립한다는 계획이었다.

1986년 9월 5일 열린 제1회 기술진흥확대회의에서 이태섭 과학기술처 장관은 “1990년 중반까지 기초과학연구소를 설립, 대학의 기초연구를 활성화해서 창조와 혁신의 장이 되도록 하겠다”고 보고했다.

이태섭 장관은 1987년 2월 12일 대통령 새해 업무보고에서 “기초과학 분야 연구 활성화를 위해 기초과학연구소를 설립하겠다”고 말하고 6월 25일 전두환 대통령 주재로 열린 1987년 제1회 기술진흥확대회의 '과학산업 육성' 보고를 통해 “올해 기초과학연구소를 설립, 1988년부터 운영하겠다”고 보고했다.

12월 11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1회 한국과학상 시상식에 참석한 전 대통령은 “과학기술은 국가 발전의 핵심이며 우리 미래를 결정짓는 열쇠”라면서 “과학기술 진흥의 토대가 되는 기초과학 육성을 위해 1988년에 기초과학연구소를 설립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전 대통령의 발언으로 기초과학연구소 설립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정권 교체기에 기관 설립은 순탄할 수 없었다. 과학기술처 계획에 문교부와 각 대학 등이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그 과정에서 있은 에피소드 하나.

5공화국 말 기초과학연구소 설립은 최종 시행 단계에 있었다. 이를 안 조완규 서울대 총장과 김시중 고려대 교수 등이 청와대로 신극범 교육문화수석비서관을 찾아가 학계의 반대 입장을 전했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A씨 회고. “이들은 평소 잘 아는 신 수석에게 '이건 말이 안 된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이런 기관은 없다'며 반대했어요. 결국 5공화국에서 기초과학연구소 설립은 무산됐어요.”

전국대학부설 기초과학연구소장연합회는 1988년 1월 21일 청와대에 연구소 설립을 반대하는 건의문을 제출했다. 이들은 건의문에서 “기초과학은 대학이 담당하며 인력 양성과 병행해야 하는데 열악한 대학 연구 환경은 방치해 놓고 과학기술처 산하에 또 하나의 연구소를 설립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보다 대학에 대한 투자를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초과학연구소장연합회는 이어 3월 18일 부산대에서 기초과학교수 토론회를 열고 반대 입장을 거듭 표명했다. 김시중 고려대 교수는 이날 “기초과학은 단시간에 연구 성과를 내는 게 아니다”라면서 “대학의 연구 잠재력을 활성화할 수 있는 장기적인 과기진흥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88년 2월 25일 노태우 정부가 출범했다. 6공화국 초대 과학기술처 장관으로 취임한 이관 장관은 대학 총장 출신으로서 누구보다 각 대학 기초연구소의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장관은 문제 해결을 위해 조완규 서울대 총장을 비롯해 기초과학계 원로, 기초과학 관련 학회장 등과 머리를 맞대고 해법을 모색했다.

그 결과 기초과학연구소 대신 대학의 기초과학연구소를 지원하는 기초과학연구지원센터를 설립하기로 정책을 전환했다.

과학기술처는 4월 12일 대통령 첫 업무보고에서 “기초과학연구지원센터를 설립하겠다”고 보고했다. 기존 기초과학연구소를 지원센터로 변경한 것이다.

황경호 당시 과학기술처 기초연구조정관의 말. “앞으로 지원센터는 고가 장비의 공동 활용과 최신 정보 제공 등 대학과 민간연구기관에 대한 지원 업무를 하는 것으로 정리했습니다. 센터도 소규모 연구 프로젝트는 수행키로 했습니다.”

5월 12일 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전국공동이용 기초연구소 설립 조사연구 보고서를 과학기술처에 제출했다. 연구책임자는 조병하 KAIST 교수였다. 조 교수는 그동안 기초과학연구소 설립을 주도한 학자였다.

이관 장관은 6월 17일 오후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1회 과학기술 21세기 모임'에 참석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올해 한국과학재단 부설로 기초과학연구지원센터를 설립, 1991년까지 385억원을 들여서 대학이 단독으로 구입하기 어려운 고가의 연구장비 외 시설 등을 구비해 각 대학 연구인력들이 공동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할 계획입니다. 지원센터에는 연구인력을 두고 대학교수 중심으로 산업계를 지원하는 형태로 운영할 생각입니다.”

이관 장관의 생전 회고. “당시는 대학 연구 활동이 초보 수준이었어요. 정부가 1980년부터 공대 지원을 시작했는데 대학에 연구시설이 거의 없었어요. 오죽하면 정부에서 '시설기준령'이라는 기준을 정했겠어요. 대학이 구비해야 할 시설기준을 정한 것입니다. 기초과학연구지원센터를 한국과학재단 부설로 한 이유는 센터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7월 6일 문교부가 기초과학지원센터 설립에 대한 의견서를 과학기술처로 보냈다.

문교부는 이 회신에서 “과학기술처가 추진하는 기초과학연구지원센터는 순수 지원 기능만 갖도록 하고 기초과학 분야 연구기능은 대학 또는 대학부설 기초과학연구소에서 수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며칠 후인 7월 12일 과학기술처는 한국과학재단에 '기초과학연구지원센터 설립 추진'이란 공문을 보냈다.

과학기술처는 이 공문에서 “기초과학연구지원센터를 한국과학재단 부설기관으로 설립하는 계획을 확정하고 이를 문교부와 협의해 동의 회신을 접수했으므로 1988년 8월 중 재단 부설기관으로 센터를 설립하기 위한 이사회 개최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하라”고 통보했다.

7월 25일 과학기술처는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가 작성한 기초연구지원센터 설립에 관한 연구 보고서를 접수했다. 총괄연구책임자는 박태원 과총 회장이고, 보고서는 127쪽에 달했다. 과총은 이 보고서 작성을 위해 설립위원회를 구성하고 실무위원장에 하두봉 서울대 교수를 선임했다. 이들은 매주 토요일 3개월여 동안 실무토론을 거쳐 보고서를 완성했다.

과총은 보고서에서 “2000년대 세계 10위권 과학기술 선진국 구현을 위해 기초과학 육성이 시급하며, 정부 지원 방안으로 기초연구지원센터 설립에 따른 제반 사항을 연구해서 기초자료로 제시한다”고 밝혔다. 이 보고서는 기초과학연구지원센터 설립의 길라잡이 역할을 했다.

과학기술처는 7월 23일 기초과학지원센터 초대 소장에 김현남 아주대 물리학과 교수를 내정했다. 김현남 소장은 당시 문교부 학술진흥위원회 기초과학분과위원장으로, 교수직과 소장직을 겸하기로 했다.

한국과학재단은 7월 30일 최순달 이사장(전 체신부 장관) 주재로 제33회 이사회를 열고 한국과학재단 부설 기초과학연구지원센터 설립을 위한 안건을 원안대로 통과시켰다.

이사회는 초대 소장에 김현남 아주대 물리학과 교수를 선임했다. 이사회는 기초과학연구지원센터 운영 규정도 제정했다.

8월 1일 기초과학연구지원센터 초대 소장에 김현남 교수가 취임했다. 사무실은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관에 임시로 마련했다.

지원센터는 9월 1일 설립준비금을 과학기술처로부처 받아 9월 12일 경기도 과천시 고려빌딩 301호로 사무실을 이전했다. 센터는 운영에 필요한 세부 사항을 수립하기 위해 8명으로 기획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장은 강영희 연세대 교수였다. 또 조한규 서울대 총장과 이상수 한국과학기술원 교수, 장세희 서울대 교수 등 3명을 고문으로 위촉했다.

센터는 9월 16일 우리나라 기초과학계를 대표하는 21명의 원로 중진학자들과 간담회를 열었다. 센터는 간담회 의견들을 수렴해 12월 기초과학연구지원원센터의 세부 운영계획을 수립했다. 과정은 복잡했지만 기초과학연구지원센터 설립은 한국 기초과학 육성을 위한 원대한 첫걸음이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