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137〉행정개혁위 출범…'국가과학위원회 설치' 건의

노태우 대통령이 1988년 5월 13일 오전 청와대에서 신현확 행정개혁위원장과 위원들에게 위촉장을 주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노태우 대통령이 1988년 5월 13일 오전 청와대에서 신현확 행정개혁위원장과 위원들에게 위촉장을 주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1988년 5월 12일.

“정부는 중앙과 지방 기능 재조정을 위해 대통령 자문기구로 행정개혁위원회를 발족합니다.”

김용갑 총무처 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이같이 발표했다.

김 장관은 “이 위원회는 1년 한시적으로 운영하며 △정부 중앙과 지방 기능 재조정, 각 부처 조직과 하부 조직의 합리적 개편 등을 목적으로 활동한다”고 말했다.

김 장관은 이어 “위원회가 공청회와 세미나 등을 통해 국민 여론을 광범위하게 수렴해 합리적인 개혁안을 마련하면 정부는 이를 정부조직법 개정 등 필요한 입법조치를 취할 방침”이라며 “위원회에는 총괄과 일반행정, 경제과학, 사회문화 등 4개 분과위원회를 두고 혁신안을 마련키로 했다”고 말했다. 이 발표에 관료사회는 바짝 긴장했다.

이튿날인 5월 13일. 노태우 대통령은 이날 오전 청와대에서 신현확 행정개혁위원장과 위원 등에게 위촉장을 주었다. 이 자리에는 이현재 국무총리와 김용갑 총무처 장관이 배석했다.

위촉장 내용은 간단했다. “위촉장. 성명 신현확. 행정개혁위원장으로 위촉함. 대통령 노태우.”

신현확 위원장은 정부 요직을 두루 거친 원로였다. 부흥부(현 국토교통부) 장관을 시작으로 경제과학심의회 상임위원(장관급), 보사부장관, 부총리겸 경제기획원 장관, 국무총리 등을 역임했다. 경북 칠곡 출신인 그는 TK(대구, 경북)대부로 불렸다. 노태우 대통령과 각별한 사이였다.

노 대통령은 이날 “민간분야 자율을 최대한 존중하고 창의력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정부 기구를 개편해 주기 바란다”며 “규제는 최소화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날 위촉장을 받은 위원은 학계와 관계, 법조계, 노동계, 여성계, 언론계 인사 등 20명이었다.

위원은 김광웅 서울대 행정대학원교수, 김성진 전 과학기술처 장관, 김채겸 쌍용양회 사장, 김학노 부산대 행정대학원 교수, 노정현 연세대 교수, 문희화 한국생산성본부 회장, 민용기 한국노총 사무총장, 박윤흔 경희대 교수, 박진환 농협전문대학장, 서기원 한국문예진흥원장, 오남석 대한변협 사무총장, 임희섭 고려대 교수, 장명수 한국일보 부국장, 정문화 총무처 소청심사위원장, 정정길 서울대행정대학원 교수, 조석준 서울대 행정대학원장, 최우석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최청림 조선일보 편집부국장, 황인정 한국개발연구원 부원장 등이고 그해 6월 29일 김진현 동아일보 논설실장을 위원으로 추가 위촉했다.

4개 분과 중 경제과학분과위원장은 김성진 전 과학기술처 장관이 맡았다. 그는 노태우 대통령과 육사 11기 동기로 체신부 장관과 과학기술처 장관을 역임했다.

신현확 위원장은 청와대에서 위촉장을 받은 후 곧장 정부종합청사 19층 대회의실에서 첫 회의를 주재했다. 신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민주화, 자율화, 국제화라는 추세에 맞게 전문가와 관계 부처 등 의견을 최대한 수렴해 2000년대를 향한 최선의 혁신안을 만들자”고 당부했다.

신 위원장은 이어 위원회 운영계획을 논의하고 분과별 전문위원을 위촉했다. 경제과학분과 전문위원은 방석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와 김세진 국무총리실 일반행정심의관을 위촉했다.

위원회 규정에 전문위원과 조사위원을 관련 부처에서 파견받을 수 있었지만 위원회는 부처 파견을 최소화했다.

총괄분과 위원장이었던 조석준 교수(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명예교수)의 회고.

“각 분과마다 교수 1명, 실무 1인의 전문위원이 있었다. 각 부처 관계자는 위원회가 필요할 때만 불러 의견을 들었다.”

그해 7월 1일. 행정개혁위원회는 자문위원 8명을 위촉했다. 고병익 전 서울대 총장과 김창규 대림산업 부회장, 이한빈 전 부총리, 김영호 우성산업 회장, 정수창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이정환 금호석유화학 사장, 서영훈 흥사단 이사장, 박동서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등이었다.

행정개혁은 예나 지금이나 부처 간 이해가 얽히고 갈등이 심해 난제 중의 난제였다.

위원으로 활동했던 김광웅 서울대 교수(초대 중앙인사위원장)의 생전 회고.

“정부 조직을 개혁하는 일은 환자 수술과 같습니다. 크건 작건 조직의 생존이 걸린 문제입니다. 자기증식 능력이 뛰어난 관료 조직을 바꾸는 일은 심하게 말해 내전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당연히 부처마다 위원회를 대상으로 다양한 로비를 했습니다.”

신현확 위원장 아들로 당시 경제기획원 과장이었던 신철식씨(현 우호문화재단 이사장)의 증언.

“아는 선배들이 저한테 달려와 나를 붙잡고 늘어지는 것이었다. “신 과장 우리 부처 어떻게 되나.” “아버님께 얘기 좀 잘해 주게.” 부처의 생사가 걸린 일이니 공무원 선배들이 눈에 불을 커는 것도 이해는 갔다. 하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대통령 청탁도 면전에서 거절하는 아버지가 아들 청탁을 들어 줄리 만무했다.”(신현확의 증언)

신 위원장은 노 대통령이 조직개혁안에 관해 이런 저런 주문을 했지만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개혁을 못합니다.”

신 위원장은 4개 분과 위원장 회의에서도 “원칙대로 개혁안을 수립하자”고 강조했다.

9월 1일. 행정개혁위원회는 과학기술 행정제도의 재정립에 대한 첫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최종안이 아닌 기본방향을 제시한 시안(試案)이었다. 보고서 작성을 위해 경제과학분과위원회는 분과 회의와 기관별 서면 조사, 지역별 세미나, 관련 인사들과 간담회 등을 개최했다.

행정개혁위원회는 현 과학기술 행정 중 △과학기술 정책 조정 통합과 자원배분 △대형 국가과제 관리와 부처 간 경합 △기초과학과 소프트웨어 연구와 인력 △산·학·관 협력과 정부출연연구소 기능 등에 문제점이 있다고 분석했다.

위원회는 5공화국까지는 대통령이 소신을 갖고 과학기술정책을 직접 주도했으니 지금은 과학기술진흥확대회의 기능이 정지 상태고, GDP(국민총생산)의 5%를 과학기술부문에 투자한다고 발표했지만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런 상태라면 선진국과 경쟁할 기초연구와 과학기술 인재양성, 첨단기술 개발, 정보산업기술, 에너지기술, 우주항공 기술 등 대형과제 추진이 불가능하다고 진단했다..

개혁위원회는 혁신안으로 △국가과학위원회 설치 △과학기술처 기능강화 △산·학·관 정책협의기구 설치 △연구비 증액 △출연연구기관 자율화 등을 건의했다.

◇국가과학위원회 설치와 각종 위원회 정비=과학기술정책의 종합조정과 자원배분, 대형국가 과제 조정을 위해 총리 또는 부총리급을 위원장으로 하고 관계 국무위원과 산업계 지도자들로 국가과학위원회를 설치한다. 간사는 과학기술처가 담당한다. 현재 원자력 위원회, 국가기간전산망조정위원회, 종합과학기술심의회 등을 국가과학위원회 분과위원회로 통합하며 우주항공 등 대형 국가과제를 위한 분과위원회를 설치한다. 위원회는 GNP의 일정비율을 배분할 수 있는 예산권을 가진다.

◇과학기술처 기능 강화와 산·학·관 정책협의 기구 설치=규제 기능 강화보다는 정책조정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국가과학위원회가 모든 과학기술 투자를 사전 심의하고 중장기 계획 수립과 국가과제 사업, 평가 기능을 가져야 한다. 표준화와 특허 기술 선정사업 관리, 기초연구 지원, 산·학·연 협력을 조정해야 한다. 산·학·관의 실질적인 협의를 위한 국가과학위원회 실무위원회를 과학기술처에 설치해 과학기술처 장관이 위원장을 맡고 위원은 관련부처 차관과 산업계 대표들로 구성한다. 과학기술처 장관 의전서열을 격상해야 한다.

◇연구 예산 증액과 과학기술 투자의 종합관리=2000년까지 GNP의 5%를 과학기술개발에 투자한다는 연차별 계획을 마련해 추진한다.

◇각 부처의 과학기술 정책 협력 강화와 국·공립연구소 활성화=각 부처에 과학기술정책과 사업관리를 전담하는 직제(차관급, 국장급, 과장급)를 신설 또는 보강하고 국·공립연구기관을 출연연구기관과 동일한 수준으로 육성한다.

◇대학 교수인력 확충과 연구여건 조성=기초연구의 중요성 증대와 고급인력 수요가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대학 교수 인력을 확충하고 과제연구비를 대폭 증액해야 한다. 대학 연구기기 운영을 지원하고 과제 선정과 평가에 대학 전문인력이 참여해 사회적 합의를 유도한다.

◇출연구기관의 자율화와 인력양성 기능 강화=출연연구기관에 대한 정부 창구를 단일화하고 출연연구기관 간 협의회를 제도화해 운영을 위임해야 한다.

◇기업의 대학연구 지원을 위한 유인제도 마련=기업인이 대학 기초연구를 위해 개인이 연구비를 기부할 경우 면세제도 등 유인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