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기획] 출발점에 선 韓 AI 반도체, 생태계 구축 시급

AI 반도체 시장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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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인공지능(AI) 반도체 업계의 시장 공략이 시작됐다. 다년간 연구개발(R&D) 노력 끝에 AI 반도체 국산화에 성공, 시장 저변 확대를 준비 중이다.

그러나 진입 장벽은 여전히 높다. AI 반도체 시장 80~90%를 차지한 엔비디아는 독자 생태계로 시장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AMD와 인텔도 가세, 치열한 한판 승부가 예상된다. 이들은 그래픽처리장치(GPU)와 중앙처리장치(CPU) 시장에서 수십년간 축적한 기술 노하우와 경험, 막대한 자본력을 앞세워 경쟁 우위를 견고히 하고 있다.

반면 국산 AI 반도체는 대부분 스타트업 팹리스가 개발하고 있다. 미래 성장 잠재력에 힘입어 대규모 투자 유치에 성공했지만 엔비디아 등 글로벌 AI 반도체 기업과 견주면 여전히 여력이 부족하다. 특히 지속적인 사업을 영위하기 위한 수요 발굴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대한민국 AI 반도체 경쟁력을 강화할 유기적 생태계 구축이 요구된다.

◇ 투자 자본 대부분을 R&D에 쏟아붓는 AI 반도체 스타트업… '수익성 개선' 필요

퓨리오사AI·리벨리온·딥엑스·모빌린트 등 국내 반도체 AI 스타트업들이 잇따라 차세대 제품을 내놓으며 시장 공략을 확대하고 있다. 기술은 궤도에 올랐다는 평가지만, 사업화에는 아직 어려움이 많다. 수요처 확보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 과제를 통해 일부 공공기관과 국내 데이터센터에서 국산 AI 반도체 칩을 활용하지만, 워낙 해외 의존도가 높아 국내 점유율 확대도 난항을 겪고 있다.

국내 AI 반도체 기업의 최대 과제는 매출을 통한 자금 확보다. 지금까지 많게는 1000억원 안팎의 대규모 투자 유치에 성공했지만, AI 반도체 개발에 투입되는 비용과 인력을 고려하면 지속적 사업 전개는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현재 국내 AI 반도체 기업이 차기 제품은 4~5나노미터(㎚) 공정에서 양산될 예정이다. 초미세 회로 구현을 위한 설계자산(IP)·설계자동화(EDA) 툴 구매 비용에 시제품 생산을 위한 포토마스크까지 더하면 설계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또 공정이 미세화할수록 투입되는 설계 인력은 대거 늘어난다.

첨단 AI 반도체 칩 하나를 설계하려면 수백억원 규모의 R&D 비용이 소요되는 것도 이유다. 지난해 기준 퓨리오사AI는 501억원, 리벨리온 136억원, 딥엑스 18억원 수준이다. 이마저도 엔비디아와 비교하면 1% 미만이다. 엔비디아는 올해 상반기(2~7월)에만 R&D로 58억1000만달러(약 7조8000억원)를 지출했다.

국내 AI 반도체 기업의 투자 유치액 대부분이 R&D에만 쓰이기 때문에, 빠른 수익성 확보가 시급하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지난해 퓨리오사AI 영업손실은 601억원, 리벨리온 159억원, 딥엑스 91억원 수준이다. 올해 제품 공급과 신제품 출시 효과로 흑자 전환이 기대되지만 당장은 규모가 크지 않을 것으로 관측된다.

◇엔비디아 대항할 韓 협업 생태계 구축 시급

사업을 통한 수익성 개선은 AI 반도체 기업의 몫으로 국내 기업은 이제 막 시험대에 올랐다. 초기 육성을 위한 지원은 반드시 수반돼야 한다는 것이 업계 중론이다. 특히 AI 반도체처럼 첨단 기술에 대한 국가별 보호무역주의가 심화되는 만큼, 국가 경쟁력과 직결된 AI 반도체 투자가 시급하다.

현재 정부는 R&D 투자비 지원 뿐만 아니라 수요 발굴과 연계한 실증 사업을 진행 중이다. 여기에 더해 민간·공공기관의 국산 AI 반도체 기반 추론 서버 투자비를 일부 지원하는 등의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특히 공급과 수요의 선순환 구조를 확보할 생태계 조성에 보다 많은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엔비디아가 AI 시장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생태계를 선제적으로 구축했기 때문이라는 목소리가 크다. 엔비디아는 단순 하드웨어(HW) 기술력 뿐 아니라 AI 반도체를 구동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SW) 개발 생태계까지 독자 확보했다. 엔비디아 AI 칩에서만 가동하는 SW 플랫폼 '쿠다'가 대표적이다. 2007년 출시해 오랜 기간 공을 들인 플랫폼이다.

이 때문에 AI 칩뿐만 아니라 이를 구현할 SW, AI 모델을 아우르는 협력 체계가 구축돼야 한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한 반도체 기업 대표는 “특정 기술 R&D에 초점을 맞춰 지원하기보다 생태계 구축 측면에서의 과제가 더 많아질 필요가 있다”며 “장기적 관점에서는 다양한 업체들과의 유기적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인력 확보를 위한 대학과의 협력도 필수다. 이혁재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수요와 공급 불균형으로 대학은 연구에 필요한 AI 반도체를 구하기 힘든 상황”이라며 “대학과 AI 반도체 팹리스 기업이 협력한다면 상호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AI 반도체 기업 자구책도 필요...치밀한 시장 전략 마련해야

생태계가 조성된다면 그 이후는 철저히 시장 논리에 따를 수밖에 없다. 국내 AI 반도체 기업의 기술력뿐 아니라 사업 역량도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는 이야기다.

국산 AI 반도체는 이제 개화 단계인 만큼 더 치밀한 사업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특정 분야에 맞춘 AI 반도체를 기반으로 매출을 확대한 다음, 범용 AI 반도체 시장을 공략해야 한다는 의미다. 현재 범용 AI 시장은 엔비디아가 쥐고 있는 만큼 침투가 쉽지 않다. 시장 성장이 가파른 만큼 시장 1%만 하더라도 1조원에 가까운 매출을 기대할 수 있어서다.

국내 한 AI 반도체 회사 대표는 “하이퍼스케일 데이터센터 업체들은 특정 용도의 AI 반도체를 개발하는 것으로 내재화하더라도 엔비디아 범용 AI 반도체와 혼용할 수밖에 없다”며 “팹리스 업체들도 엔비디아·AMD·인텔과 직접 경쟁하기보다 특정한 영역에서 점유율을 넓혀가는 전략을 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데이터센터 시장 대비 상대적으로 진입 장벽이 낮은 온디바이스AI 시장을 노리는 것도 한 방법이다. 디자인하우스(설계 지원) 업체 A사 대표는 “선단공정으로 국내 팹리스 기업들이 데이터센터용 AI 반도체를 개발하고 있지만 대량 양산으로 이어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며 “상대적으로 온디바이스AI 업체들의 수요처 발굴이 더 쉽고 성장세도 가파를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박진형 기자 ji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