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0월이 되면 전 세계의 관심은 스웨덴 왕립과학원으로 집중된다. 물리학, 화학, 생리학, 경제학, 문학, 평화 등 6개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를 발표하기 때문이다. 2024년 노벨상 수상자 중 인공지능(AI) 업계에서 가장 주목한 인물은 물리학상 수상자인 존 홉필드(John Hopfield)와 제프리 힌튼(Geoffrey Hinton), 화학상 수상자인 데미스 허사비스(Demis Hassabis)다.
이들은 모두 AI 연구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프린스턴대 홉필드 교수는 '홉필드 네트워크'(Hopfield Network)를, 토론토대 힌튼 교수는 '볼츠만 머신'(Boltzman Machine)을 제안해 기계 학습의 기초가 되는 신경망 모델을 정립한 인물이다. 특히, 힌튼은 역전파(backpropagation) 알고리즘을 통해 퍼셉트론(percptron)의 한계인 XOR 문제를 해결했고, 심층 신뢰 신경망(Deep Belief Network:DBN)과 합성곱 신경망(Convolutional Nerual Network:CNN)을 통해 AI를 2차 빙하기에서 끌어내 딥러닝의 전성기로 이끈 주인공이기도 하다. 구글 딥마인드의 허사비스 CEO는 이세돌 9단과 바둑 대결을 펼쳤던 알파고(AlphaGo)를 개발한 주역이다.
AI 연구자가 왜 물리학과 화학 분야의 최고 학술상을 수상하는 지에 대해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이는 AI가 바로 다른 분야와 접목했을 때 그 가치가 배가되는 '융합'(融合·convergence) 학문이기 때문이다. AI는 데이터 과학(data science)와 더불어 대표적인 융합 학문으로 다양한 산업 내 기술 적용을 통해 진가가 드러나는 학문이다.
따라서 AI 분야 종사자는 과거 컴퓨터 과학(computer scinece) 전공자가 주류를 구성했지만, 점차 타 학문에 기반을 두고 AI를 활용하는 이들이 증가하고 있다. 예를 들어 AI에 최적의 명령을 내리는 프롬프트 엔지니어(prompt engineer) 중 뛰어난 성과를 내는 어학 전공자가 많다. 소위 '문과라서 죄송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문송'의 전형인 인문대 출신이 AI 분야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이는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AI 도구들이 자연어 처리에 기반한 언어 모형(language model)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에 AI로 앞서 나가는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공학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전공자를 AI 서비스 개발자로 채용하고 있다. 다양한 학문적 기반을 가진 이들이 제조, 유통, 금융, 헬스케어, 건설, 농수축산 등 여러 산업군에서 AI의 원활한 활용을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미래학자인 토마스 데이븐포트(Thomas Davenport)는 2012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avard Business Review)에 기고한 칼럼에서 21세기 가장 매력적인 직업이 데이터 과학자(data scientist)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 주장은 십수년이 지난 현재 정확한 예측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글래스도어(Glassdoor), 몬스터닷컴(monster.com) 등 글로벌 채용 플랫폼이 발표한 직종별 연봉 순위를 통해 검증되고 있다. 그는 데이터 과학자가 높은 연봉을 받는 이유로 산업 역량과 기술 역량을 동시에 갖춘 융합형 인재라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
AI 시대에서 있어 이러한 주장은 데이터 과학자뿐 아니라 AI 서비스 개발자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AI 역시 업종에 대한 노하우를 의미하는 산업 역량과 기술 역량이 합쳐졌을 때 비로소 가치가 급증하는 융합 학문이기 때문이다.
국내 여러 기업에서 AI 분야 석박사 학위를 보유한 우수 인력을 채용하고, 연구개발에 많은 예산을 투입했음에도, 이렇다 할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이유는 기술 역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가장 큰 원인은 산업 내 기술 적용에 실패했거나, 고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조직 내에서 AI 부서가 영업, 마케팅 등을 담당하는 현업 부서와 원활하게 소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AI 도구를 잘 다루고, 제대로 된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기술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AI를 각 산업에 원활하게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학제 간 교류를 통해 지식을 융합하는 '통섭'(統攝·consilience)의 지혜가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산업과 기술을 동시에 이해하는 인재를 키울 필요가 있다. 대학에서는 융합과 통섭에 기반한 폭넓은 시야를 가진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각 전공에 융합 학문인 '데이터 과학' '인공지능' 과목을 개설하고, AI의 산업 내 활용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
이제는 '융합'과 '통섭'의 시대다. 특정 분야의 한 가지 기술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기반으로 기업의 효율성을 향상시키고, 고객을 만족시킬 수 있는 서비스 개발이 중요한 시점이다.
서울대 산업공학과 객원교수·전 하나금융지주 그룹데이터총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