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대학포럼] 〈194〉대전환의 시대, 산업기술정책과 산업 R&D의 임무

박재민 건국대학교 교수·ET대학포럼 좌장
박재민 건국대학교 교수·ET대학포럼 좌장

세계는 여러 측면에서 대전환 단계로 접어든 듯하다. 금융위기, 경기침체, 보편적 국제규범의 후퇴, 선진국들은 각자 자신에게 유리한 새로운 경제적·정치적 규범을 모색하고 있다. 기술경쟁은 단지 국가간 선의의 경쟁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가 되고 있다. 기술이 바로 주권이 되는 세상이 되었다.

여러 선진국의 정책에 핵심기술은 정책적 주요 목표를 거론할 때 빠지지 않고 있다. 공급망과 경제안보를 언급할 때 양자기술, 고속컴퓨팅, 로봇과 인공지능(AI), 반도체가 빠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 국가간 경쟁은 마치 오래 전 북극점과 남극점을 누가 먼저 도달할거냐는 국제 경쟁을 떠올리게까지 한다. 지금은 이들 대전환 기술이 주는 기회의 땅을 누가 먼저 밟고 차지할 것이냐는 경쟁이라는 차이가 있다.

우리도 이 경쟁에 빠져 있지 않다. 연구개발(R&D) 총액 규모 세계 6위, R&D 집약도 기준 세계 2위에 위치하고 있다. 산업·기업 R&D 투자 역시 최근 10년간 국가 R&D 증가율과 비슷하거나 높은 수준으로 증가했다. 단지 한 가지 중대한 위기가 처해 있다. 그것은 밖으로부터의 위협이 아니다. 이 산업 R&D에 있어 정부의 역할에 대한 이견이 바로 그것이다.

그동안 일각에서는 기업이 중심이 되어 수행하게 되는 산업 R&D에 대한 정부의 직접 지원을 축소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되어 왔다. 산업 R&D에 대한 정부의 직접 지원은 효율적이지 못한 시장 개입이라고 지적한다. 공교롭게 대학이 중심이 되는 기초 R&D와 경쟁적 위치에 놓고 산업 R&D 지원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본다.

종래의 산업·기업 R&D의 정의도 이런 인식을 반영한다. 대학 및 공공연구기관의 기초연구와 범용기술연구의 결과를 활용해 제품이나 서비스를 연구하거나 시험·양산 혹은 사업화 단계의 연구와 시장개척과 유지를 위한 활동으로 본다. 전형적인 지식의 번역적(translational) 단계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여러 국가와 정부가 자처하고 있는 자신의 역할은 이렇지 않다. 앞서 언급했듯이 정책적 주요목표를 거론할 때 양자기술과 AI 같은 핵심기술의 육성을 빠뜨릴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들 국가에게도 종래 산업·기술 R&D의 정의는 임무지향이라는 다른 시각으로 바뀌어 가는 듯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산업정책의 귀환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과연 신산업정책 그리고 이것에서 산업 R&D의 새로운 역할과 임무는 무엇일까. 분명 몇 가지 핵심방향이 있다. 그 중 첫째는 변혁(transformation)이라는 키워드에서 찾을 수 있다. 종래의 산업 R&D가 이미 창출되 지식의 사용을 위한 번역적 활동이었다면 이제는 산업 미래의 모습을 바꾸는 변혁이 되어야 한다.

두 번째는 생성성(generativity)이란 렌즈를 통해 보는 미래 기술의 기능이다. AI와 양자컴퓨팅이 중요한 것은 이것이 산업의 근본적 모습을 바꾸는 보편기술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지금 여러 오픈AI 모델이 비록 기존의 지식을 기반으로 하지만 무한히 새로운 지식을 조합하고 창조해 내는 것처럼 이들 기술은 산업 대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놓쳐서는 안되는 기술들인 셈이다.

세 번째는 파스퇴르 쿼드런트(Pasteur Quadrant)라는 변혁적 혁신의 수용이다. 과거 우리는 산업 R&D를 기초 연구결과를 목적에 바탕으로 두고 재해석하고 번역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파스퇴르 쿼드런트적 혁신이란 문제해결과 과학적 탐구를 공히 도구로 이해하는 번혁적 대안의 창조를 의미한다.

이런 관점에서 산업R&D는 기초·원천은 물론 제조·생산 단계까지 굳이 구분되어서는 안된다. 종래 우리가 흔히 즐겨 쓰던 기술성숙도(Technology Readiness Level, TRL)에 기반한 구분은 전형적으로 잘못된 문제인식이다.

우리의 역할은 이제 산업기술정책의 임무와 산업 R&D를 재정의하는 것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여기서 분절과 이분법적 사고는 설곳이 없다. 국가간 무한경쟁이라는 자극적인 전제를 둘 필요도 없다. 우리는 단지 대전환의 시대 초입에 들어서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충분히 말해주고 있다.

박재민 건국대학교 교수·ET대학포럼 좌장 jpark@konku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