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홍수로 현재까지 217명이 사망한 가운데, 수해 현장에 방문한 스페인 국왕 부부가 분노한 주민들로부터 진흙과 계란 세례를 받았다.
3일(현지 시각) CNN·BBC 등에 따르면 지난 2일 스페인 국왕 펠리페 6세와 레티시아 왕비는 페드로 산체스 총리, 카를로스 마손 발렌시아 주지사와 함께 홍수 피해가 집중된 발렌시아주 외곽 지역 파이포르타를 방문했다. 이 지역에서만 최소 62명이 사망했다.
국왕 부부가 수해 현장에서 사진을 찍자 분노한 주민들이 몰려들어 “살인자!”, “수치”, “꺼져” 등을 큰소리로 외쳤다. 일부 주민들은 계란이나 진흙을 뭉쳐 던지기도 했다. 경호원들은 우산을 펼쳐 왕실 일가를 보호하려고 했으나 진흙을 모두 피할 수는 없었다.
펠리페 6세는 침착함을 유지하며 주민들의 말을 경청하려 했고, 레티시아 왕비도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지만 주민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분노한 주민들의 항의가 계속되자 결국 예정된 시각보다 이르게 방문을 종료했다고 AFP 통신은 전했다. 또한 다른 수해 지역인 치바 방문도 취소됐다.
시위 현장에 있던 한 소년은 BBC에 “나는 16살이다. 우리도 돕고 있는데, 지도자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여전히 죽어가고 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흐느꼈으며, 이번 홍수로 집과 직장을 모두 잃은 여성은 “그들(지도자들)이 우리를 죽게 내버려두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다”고 호소했다.
주민들은 당국의 안이한 대응이 피해를 키웠다고 생각해 이처럼 분노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습 폭우가 쏟아진 것은 지난달 29일. 현재까지 217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으며 이 가운데 214명의 사망자가 발렌시아주에서 나왔다. 기상 당국이 홍수 가능성을 경고했지만 긴급 재난 안전문자는 10여 시간 뒤에나 발송됐으며 홍수가 발생한 이후에도 미흡한 대응이 이어져 피해가 확산됐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얻었던 펠리페 6세가 이처럼 국민들에게 비난을 받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게재한 영상을 통해 “피해 주민들의 분노와 좌절을 이해한다. 피해자들에게 국가가 온전하다는 희망과 보장을 줘야 한다”고 머리 숙였다.
이날 분노한 주민들은 국왕 부부에게도 야유를 보냈지만 특히 마손 주지사와 산체스 총리를 맹비난했다.
BBC가 검증한 영상에는 차를 몰고 달아나는 산체스 총리의 모습도 확인됐다. 일부 주민들이 던진 딱딱한 물체에 산체스 총리가 탑승했던 차량의 창문이 깨진 것으로 전해졌다.
산체스 총리와 마손 주지사가 소속된 정당이 달라 사고 발생 후 피해 복구를 위한 행정 절차에 시간이 걸린 것으로 보인다고 CNN은 지적했다. 스페인 연방 정부는 지역 정부의 승인 없이 비상 자금과 자원을 제공할 수 없는데, 행정 처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피해가 발생한지 나흘이 지난 2일까지 피해 현장 복구가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희원 기자 shw@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