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143〉행개위, 과기행정 최종 건의안…“과학기술 우위주의 확립해야”

노태우 대통령이 1989년 8월 22일 청와대에서 행정개혁위원회가 마련한 행정 개혁안을 보고받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노태우 대통령이 1989년 8월 22일 청와대에서 행정개혁위원회가 마련한 행정 개혁안을 보고받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끝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그동안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대통령께 건의할 최종 보고서 내용을 확정합시다.”

1989년 7월 18일 신현확 위원장(전 국무총리)은 행정개혁위원회 전체 회의를 열었다. 1년 2개월 동안의 행정개혁위원회 활동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서다.

행정개혁위원회의 설치 목적은 국정 운영의 새 틀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관료사회에 미치는 파급력을 누구보다 잘 아는 행정개혁위원회 위원들은 살얼음판을 건너는 심정으로 하나하나 신중하게 각계의 의견을 수렴해서 행정 개혁안을 만들었다.

행정개혁위원회는 그동안 전체회의 19회, 운영위원회 72회, 분과위원회 42~60회, 전문위원회 135회를 열었다. 또 관계 부처 관계자와 전문가를 불러 폭넓은 의견을 수렴했다. 협회 단체, 투자기관 등 615개 기관을 대상으로 행정개혁에 대한 의견조사를 실시했다. 7개 지역에서 9회에 걸친 간담회와 공청회, 지역토론회 등을 개최했다.

위원회는 4개 분과위원회를 두고 그 아래 위원회 업무에 관한 조사 및 연구 업무를 담당한 전문위원과 조사요원을 두고 개혁안을 마련했다.

행정개혁위원회의 개혁안은 1963년 이후 정부 차원에서 마련한 가장 큰 폭의 개혁안이었다.

행정개혁위원회는 개혁안에서 기존 정부 기관을 줄였다. 현행 2기관(감사원, 안기부) 2원(경제기획원, 통일원), 16부 4처 13청, 1위원회(사회정화위원회), 1대(기상대)의 정부조직을 2기관 2원, 14부 6처 13청으로 개편하고 현재 42개 기관을 39개 기관으로 축소했다. 또 문공부를 문화행정과 공보행정으로 분리, 문화행정은 체육부의 체육행정과 통합해 문화체육부를 신설하고 공보행정은 공보처로 개편토록 했다. 상공부와 동력자원부를 통합해 산업통상부(가칭)로 하고 문교부는 교육부, 건설부는 건설주택부로 각각 명칭을 바꾸는 한편 환경청은 환경처로 확대 개편키로 했다. 행정개혁위원회는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을 통계청, 중앙기상대를 기상청으로 격상키로 했다.

행정개혁위원회는 정부 조직개편안을 포함해 모두 47개 행정개혁 과제를 정부에 건의키로 했다.

행정개혁위원회는 이 밖에 800여건의 행정규제 완화, 행정구역 재검토, 행정공개주의, 특허행정 기능 보강 등을 확정하고 이를 정부에 제안했다.

개정개혁위원회는 이 같은 행정개혁이 필요한 이유로 △정치 환경 변화 △경제 환경 변화 △사회 문화 변화 △개방화와 국제화 가속 등을 들었다.

개정개혁위원회는 이에 따라 행정개혁의 기본 방향으로 △민주화 추진과 인권 보장 △민간 자율성과 창의력 신장 △통일 염원 실현 △국제화 시대 대응 △지방화시대 준비 △지속적인 경제 성장 △복지형평 구현 △행정체제의 효율성 증진 등으로 설정했다.

행정개혁위원회의 개혁 건의안 가운데 과학기술 행정체제 조정에 관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행정개혁위원회와 경제과학분과위원회(위원장 김성진 전 과학기술처 장관)는 과학기술 행정체제 조정의 배경에 대해 “우리는 노동집약적 산업을 근간으로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지만 앞으로 산업 발전은 첨단 기술 발전에 따른 기술집약적 산업 구조로 이행하고 각 부문에서 정보화·전문화가 급속히 이뤄져 과거와 같은 개발 전략에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행정개혁위원회는 “우리나라 과학기술 수준은 가공과 조립 등 생산기술은 상당한 수준이지만 신소재와 소프트웨어 등 핵심기술은 낙후한 실정”이라면서 “이를 극복해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국가 발전 기조의 모든 분야에 과학기술 우위주의를 확립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정책 개발과 행정체제를 구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행정개혁위원회는 한시적으로 설치 운영하는 대통령 소속의 과학기술자문회의를 헌법 규정에 의한 자문기관으로 상설화해서 정례회의 등을 통해 과학기술 전반에 관한 기본방침을 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행정개혁위원회는 또 “정부는 과학기술 발전의 중요성에 상응하도록 연구개발 투자를 획기적으로 확대하고, 과학기술처는 과학기술 발전의 근간인 기초과학 진흥을 위한 정책에 중점을 두며, 산업 관련 부서는 산업기술 분야에 대한 정책과 연구개발 지원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행정개혁위원회는 국가 연구개발 투자액이 한국은 미국의 48분의 1, 일본의 21분의 1에 불과하고 정부 부담액도 미국의 117분의 1, 일본의 21분의 1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행정개혁위원회는 대형화하는 과학기술이나 첨단기술 분야는 관련 부처 간 유기적인 협조 아래 국가 차원에서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밝혔다.

행정개혁위원회는 과학기술처의 조직(기술정책실, 연구개발조정실)과 업무를 조정 개편하고, 안전심사관과 원자력국의 일부 기능을 통합해 원자력안전국으로 개편하며, 원자력 개발 기능은 동력자원부로 이관토록 했다.

행정개혁위원회는 과학기술처가 통합 관리하는 정부출연연구기관 가운데 기초과학 부문과 첨단과학기술 부문 연구소는 과학기술처에서 관장하고 산업 관련 연구소는 관계 부처 간 협의를 거쳐 당해 산업을 주관하는 부처로 이관토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관 받은 부처는 연구관리를 효율적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관련 제도와 체제를 정립하고 출연연구기관 간 협의체를 제도화해서 정부의 세부 통제를 지양하며, 일반 운영에 관한 사항은 협의체에 위임토록 제안했다.

행정개혁위원회는 체신부 행정 체제 개편안도 제시했다. 행정개혁위원회는 정보화사회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현행 과 단위에서 수행하는 정보통신 정책을 국 단위로 확대하라고 강조했다.

7월 31일 오후 행정개혁위원회는 전체회의를 열고 보고서 문안을 최종 확정했다.

신혁확 위원장은 회의에서 “인쇄소에서 인쇄 작업이 끝나는 대로 8월에 노태우 대통령에게 행정개혁안을 건의키로 했다”고 말했다.

행정개혁위원회가 마련한 과학기술 행정체제 조정안에 대해 과학기술계는 크게 반발했다.

“이게 뭐야?”

과학기술계가 기대한 과학기술처의 부(部) 승격도 쏙 빠졌고, 산업 관련 연구소도 관련 부처로 다수 이관키로 했기 때문이다.

8월 1일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는 산하 228개 학회와 연구기관 연명의 성명서를 회장단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했다.

박태원 과총 회장을 비롯한 민관식 명예회장(전 문교부 장관), 권이혁 차기 회장(전 문교부 장관) 등 회장단은 기자회견에서 “과학기술 혁신만이 우리의 살길이라는 점에서 이번 행정개혁위원회의 조정안은 기대에 크게 미흡하다”면서 “과학기술 정책을 종합 조정할 수 있는 부 또는 부총리급 원(院)으로 격상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회장단은 또 정부출연연구소의 관장 부서 이관은 재고해야 하며, 출연연구기관의 기능을 기초연구와 첨단기술 개발에 주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8월 22일 오전 노태우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신현확 위원장으로부터 행정개혁위원회가 마련한 행정개혁안에 대한 최종 보고를 받았다.

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내각은 행정개혁에 따른 부작용과 역기능을 최소화하는 등 종합적으로 검토해서 구체적인 추진방침을 수립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노 대통령은 보고가 끝난 뒤 신혁확 위원장 등 개정개혁위원회 위원들과 오찬을 함께하며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했다.

8월 30일 오전 김용래 총무처 장관은 조직 개편에 대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김 장관은 “노태우 대통령 지시대로 공직사회 동요와 부작용, 역기능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직개편은 신중히 결정해서 점진적으로 추진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행정개혁위원회의 개혁안을 받아든 정부 측 태도는 뜨뜻미지근했다. 각계의 의견을 수렴해서 어렵게 마련한 개혁안을 정부에 제안했지만 반영률은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당장 행정개혁위원회 위원들의 불만이 터져나왔다.

위원들은 신현확 위원장을 만나 하소연했다.

“위원장님, 정부가 이런 식으로 개혁안을 받아들이면 위원회는 뭐하러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기들이 하고 싶은 것만 할 것이라면 위원회는 만들 필요가 없었던 것 아닙니까.”

이들의 반발을 달래는 일은 온전이 신혁확 위원장 몫이었다. 신 위원장도 집에 와서는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괜히 고생하면서 위원장을 했나 보다.”(신현확의 증언)

과학기술계가 소망하던 과학기술처의 부(部)나 원 격상 등은 세월이 지난 뒤 후임 정부에서 실현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는 과학기술처를 과학기술부로 승격했다. 2004년 노무현 정부는 과학기술부총리 제도를 도입해 과학기술계의 박수를 받았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