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꿈이란 있을까?
아침 6시. 알람이 울리자마자 눈을 뜬다. 아직 졸린 눈으로 부엌으로 향해 아이들의 도시락을 싸고, 남편의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아이들을 깨우고, 씻기고, 가방을 챙기고 나면 어느새 집이 조용해진다. 잠시 소파에 앉아보지만, 해야 할 집안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돌아서면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고, 학원을 보내고, 숙제를 확인하고 나면 하루가 끝난다.
결혼 직후에는 맞벌이를 했다. 아이들이 태어나서 그마저도 힘들어지고, 나의 삶은 아이들에게 집중 되었다. 어린이집을 보내고 찾아오는 공허함 속의 우울증은 나를 갉아 먹었다. 30대 엄마의 지독하게 평범한 일상을 복 받은 일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속에 나의 시간은 멈춰 버린 듯 한 기분이 든다. 아이들이 자라는 속도와는 달리, 나의 시간은 멈춰 있는 것 같고, 그리고 문득 생각이 든다.
나를 위해 살아 던 나날들. 나의 가치관이 살아 숨 쉬던 그날들. 나는 죽었고, 나의 가치관들이 죽어 버렸다.
엄마가 꿈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가정의 지속성을 유지하고, 더 나아가 국가의 지속성을 담보하는 일이다. 아무리 맞벌이를 하고, 공동 육아를 외친다 하더라도, 엄마가 육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아빠가 넘어서기 어렵기 때문이다.
'Mother's Baby, Father's Maybe'라는 말처럼, 엄마와 아이 사이에는 아빠가 넘을 수 없는 어떤 유대감이 존재한다. 대한민국에서는 미혼부가 출생신고를 위해 유전자 검사를 해야 했던 불편함도 있었고, 외할머니 집과 외할머니의 사랑이 더 친근하게 다가오는 이유도, 어쩌면 유전학적 명확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유대감만으로 엄마의 삶이 온전히 설명되지는 않는다. 육아와 엄마의 삶, 엄마의 삶과 육아.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실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는 관계다. 하지만 그런 설명조차 필요 없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한 고민이라 생각한다.
아이가 집에 있는데 엄마는 마음 편히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없고, 마음 한 구석에는 늘 미안함이 자리한다. 그렇다고 일을 그만두면 집 대출금과 학원비는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고민들이 쌓여 첩첩산중처럼 느껴진다. 꿈은 희미해지고, 결혼의 로망도 사라진다.
엄마의 꿈이 사라지고, 대한민국도 함께 사라지고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전셋집이 내 집이고, 은행 대출로 산 집이 대출 없이 온전히 내 집이며, 지금 타고 다니는 차 또한 대출 없이 내 소유라면 어떨까? 단지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워지는 기분이다. 자본주의 기반으로 돌아가는 대한민국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결혼과 출산이 사회적 비용이 아니라 투자로 여겨지도록 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흥미로운 사례도 있다. 종교인들은 사망보험금을 가입 시점부터 기부하기로 약정하기도 한다. 자산가들은 손주들이 성인이 되는 시점에 사용할 수 있도록 신탁을 활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모델을 국가 정책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국가는 신혼부부와 무주택 가구를 대상으로, 장기적인 주택 보유 및 평생 거주를 보장하는 프로그램을 도입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집을 소유하는 문제를 넘어 안정적인 삶의 기반을 마련해 줄 것이다.
꿈을 꾸는 엄마가 늘어나야, 대한민국이 죽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함성룡 전 글로벌청년창업가재단 이사장(C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