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의 분위기는 숙연했다.
1990년 12월 20일 오전 대통령 직속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는 청와대 회의실에서 마지막 회의를 개최했다. 이날 회의는 자문회의가 1년 6개월 동안의 활동을 마무리하면서 노태우 대통령에게 국가과학기술발전을 위한 정책을 건의하는 자리였다.
오전 10시. “대통령님이 입장하십니다.”
노태우 대통령이 회의장에 입장해서 조완규 위원장을 비롯한 자문위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그동안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자문회의는 노 대통령이 자리에 앉자 곧바로 시작됐다. 회의에는 조 위원장을 비롯해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 장관, 김성진 전 과학기술처 장관, 오명 전 체신부 장관, 정근모 전 과학기술처 장관, 권이혁 한국과학기술단체연합회장,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 서영훈 KBS 사장 등 한국을 대표하는 자문위원 30명과 김진현 과학기술처 장관 등이 참석했다.
조완규 위원장은 이날 회의에서 “앞으로 대통령께서 과학기술정책을 직접 주도해 주시길 건의합니다”라고 말했다.
조 위원장은 과학기술진흥을 위한 정책 목표로 △정보화 사회 촉진 △산업기술 선진화 △복지기술 고도화 등 세 가지를 노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조 위원장은 이를 위한 3대 실천 과제로 △양질의 과학기술 인력 양성 △과학기술 투자 재원 확충 △과학기술 개발체제 확립 등을 제안했다.
자문회의는 양질의 과학기술 인력 양성 방안으로 공업계 고교 증설과 학생정원 증원, 첨단산업 관련 전문대학 육성, 박사과정 우수학생에 대한 병역특례 확대와 1대 40의 교수 대 학생 비율을 2001년까지 1대 20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자문회의는 또 2001년도 국내총생산(GNP) 대비 5%의 과학기술 투자계획 실천을 위해 정부 과학기술 예산 부문에서 △1995년까지 과학기술투자 GNP 대비 1% 실현 △과학기술세 신설 검토 △국공채 발행 △국방비 중 연구개발 투자 비중을 증대시키고 기업체 연구개발 투자 부문에서 금융지원 조세 감면을 확대하는 한편 민간기업연구소 신규 설립과 연구체제를 확대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문회의는 과학기술체계 확립을 위해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를 상설화해서 정기적으로 대통령이 직접 주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또 내각 차원에서 종합과학기술심의회를 강화해 부처 간 이견을 조정하고, 과학기술예산 배분심의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의 정책 건의에 대해 “내년부터는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를 상설기구화하고 과학기술진흥회의를 정례화해서 범국가적인 과학기술진흥시책을 강화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앞으로 2년 동안의 과학기술진흥정책 방향과 관련해 “대덕연구단지 건설을 임기 중에 완성해서 과학기술 메카로 육성하고, 광주·전주·부산·대구·강릉 등에도 첨단과학산업연구단지를 조성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과학기술 투자 확대와 인력양성 사업을 지속적으로 확대 추진할 것이며, 과학기술 혁신을 통한 제조업 활성화로 치열한 국제경쟁에 대응토록 하겠다”고 말했다.
지난 1989년 6월 대통령령 제12687호에 근거해서 출범한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는 활동 시한이 1990년 말까지였다. 한국을 대표하는 저명인사 30명으로 자문위원회를 구성, 그동안 120여 차례 회의를 열고 각 부처와 과학기술계의 요구를 수렴해 왔다.
과학기술처는 이에 앞서 1990년 10월 11일 관계부처 협의를 거쳐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법안을 마련해 국회에 제출했다.
과학기술처 관계자의 말.
“당시 1990년 12월 31일까지 한시적으로 운영하는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를 상설화하기 위해 헌법 제127조 3항에 근거해서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를 설치하려고 사전에 관계부처 협의를 거쳐 법안을 마련했습니다.”
당시 법안의 주요 내용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는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보, 인력개발 등에 관한 기본정책 방향과 제도발전에 대해 대통령 자문에 응한다.
둘째 자문회의는 위원장 1명을 포함한 8명 이내 위원으로 구성하고, 위원은 과학기술 진흥에 이바지할 수 있는 학식과 경륜이 풍부한 인사 가운데에서 대통령이 임명 또는 위촉하며, 위원장은 위원 가운데에서 대통령이 임명한다.
셋째 자문회의는 관계 행정기관 공공단체 등에 대해 필요한 자료와 정보 제공 등을 요청할 수 있다.
법안 소관 상임위원회는 국회 경제과학위원회였다. 위원장은 김봉호 의원이었다. 국회 경제과학위원회는 10월 12일 소위원회를 구성하고 법안을 소위원회로 넘겼다. 위원회는 이듬해인 1991년 2월 4일과 5일 법안을 심의했다.
이날 위원회에는 김진현 과학기술처 장관이 출석, 제안설명을 했다.
“대통령에 대한 과학기술 자문의 필요성 때문에 지난 1989년 6월부터 대통령령에 따라 과학기술자문회의를 1990년 12월 31일까지 한시적 기구로 신설한 바 있습니다. 그동안 자문회의는 과학기술과 국가 정책 목표와 지원 문제에 대해 심도있게 토론하고 자문하는 활동을 활발하게 해왔습니다. 그러나 현재 한시기구 체제로는 종합적인 과학기술 정책 발굴과 자문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동안의 운영경험을 바탕으로 헌법 제127의 규정에 따라 영속적인 기구로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법안을 제안한 것입니다.”
소위원회는 법안 내용 가운데 일부를 수정해서 본회의로 넘겼다. 소위원회가 수정한 내용은 자문위원수 증원이었다. 애초 8명인 위원을 11명으로 늘렸다. 이유는 복잡다기한 과학기술 관련 여러 내용을 종합하고 이를 자문하려면 위원수를 증원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애초 정기회의와 임시회의를 개최토록 했으나 임시회의는 자문기구 성격에 합당하지 않아 정기회의만 열도록 수정했다.
이런 법안에 대해 경제과학위원회 전문위원은 검토 보고에서 “오늘과 같이 과학기술정책이 국가와 민족 장래를 결정하는 최대 요인인 만큼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시의적절한 정책”이라고 말했다.
국회는 1991년 2월 7일 오후 4시 본회의를 열고 법안을 논의했다.
김재광 당시 국회부의장이 개회를 선언했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법안을 상정합니다. 경제과학위원회 이해찬 의원 심사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해찬 의원이 단상으로 나와 법안 심사보고를 했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법안은 정부로부터 1990년 10월 11일 제출받아 10월 12일 경제과학위원회로 회부했습니다. 이 법안의 주요 내용은 헌법 127조 제3항에 근거한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를 설치해서 과학기술의 혁신과 제도 발전 등에 관해 대통령 자문에 응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경제과학위원회는 1991년 2월 4일과 5일 소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제반 절차를 거쳐 이 법안을 심도 있게 심사한 결과 자문회의 위원을 다수 늘리는 등 일부 조항을 수정하기로 결정했습니다. 2월 6일 법제사법위원회의 체계의 자구 심사를 거쳐 오늘 본회의에 상정하게 된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유인물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당 위원회가 심사보고를 한 대로 의결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김재광 부의장이 다시 회의를 진행했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 법안에 대해 경제과학위원회에서 수정한 부문과 기타 부분 원안에 대해 여러 의원들께서는 이의가 없으십니까?”
“이의 없습니다.”
“그러면 가결했음을 선포합니다.”
국회는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법을 1991년 2월 21일 정부로 이송했다.
정부는 그해 3월 8일 국무회의를 거쳐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법을 법률 4361호로 공포했고, 이날부터 시행했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상설화에 대해 과학기술계는 두 손을 들어 환영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