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엔 주재 북한 대표부가 사용하는 전화번호의 음성사서함이 외부에 의해 조작된 정황이 포착됐다. 미국 CNN은 북한 대표부의 유선전화가 해킹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6일(현지시간) 전했다.
CNN은 지난 9월 말 유엔 회원국 연락처에 등록된 뉴욕 북한 대표부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이 같은 상황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해당 번호는 북한 당국과 직접 연결할 수 있는 드문 공식 연락 수단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전화를 걸었을 때 정상적인 안내방송 대신 북한을 조롱하는 내용의 음성이 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전화는 연결되지 않은 채 음성사서함으로 전환됐으며, 동아시아인의 억양을 흉내 낸 높은 음색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음성은 북한의 고질적인 식량난을 희화화하면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연락하려는 사람은 메시지를 남기라고 안내했다.
이어 메시지를 남겨두면 누군가 머지않아 식사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식의 비꼬는 발언도 덧붙였다.
CNN은 이 음성사서함이 최근 3년 사이 어느 시점에 침해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데이비드 맥스웰 아시아태평양전략센터 부회장이 2023년 11월 같은 번호로 통화했을 당시에는 일반적인 음성 안내가 나왔던 것으로 확인됐다.
전문가들은 현재로서는 공격 주체를 특정하기 어렵지만 음성사서함의 인사말을 변경하는 작업 자체는 생각보다 간단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사이버보안 연구원 마틴 비고는 CNN에 통신사에서 처음 설정한 기본 비밀번호를 그대로 사용하는 이용자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특히 기본 비밀번호가 전화번호 뒤 네 자리로 설정되는 사례가 많아 이를 변경하지 않았다면 외부인이 쉽게 접근할 가능성이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네 자리 숫자로 구성된 비밀번호의 경우 자동으로 여러 조합을 입력하는 프로그램을 활용하면 약 40달러의 비용으로도 음성사서함에 비교적 빠르게 침입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북한 대표부 측은 관련 내용을 묻는 CNN의 이메일 문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CNN 취재진이 뉴욕에 있는 북한 대표부 사무실을 직접 찾아 문제의 음성 내용을 들려주자 현지 직원은 당황한 반응을 보이며 해당 번호가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하지만 해당 전화번호는 지난달 김선경 북한 외무성 부상이 유엔총회에서 연설한 원고에도 연락처로 포함돼 있었다. CNN은 6일 기준으로도 문제의 조롱성 음성 메시지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이번 사건을 두고 한때 북미 간 외교 접점으로 기능했던 '뉴욕채널'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사례라는 분석도 제기됐다.
과거 북한 대표부는 뉴욕을 기반으로 미국과 북한 사이의 주요 소통 창구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둘러싼 협상과 비핵화 시도가 잇따라 성과를 내지 못하면서 양국 사이에 남아 있던 제한적인 외교 접촉도 크게 위축됐다는 것이다.
조엘 위트 전 미국 국무부 북한담당관은 “현재 뉴욕채널은 사실상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며 이번 음성사서함 조작 역시 북미 관계가 처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평가했다.
이원지 기자 news21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