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라인> 이젠 관객의 몫으로

모인 문화산업부장

 영화 「거짓말」이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등급 보류판정을 받은 것은 지난 7월 중순의 일이었다. 미성년자와의 변태적 성행위와 가학적 장면 등이 너무 적나라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는 2개월의 등급보류기간이란 판정을 내려버렸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과 영화제작사측이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음은 물론이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점도 그것이지만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전신인 공연예술진흥협의회(공진협)의 심의 잣대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 영화는 결국 외국의 한 국제영화제에 먼저 선보이는 「수모」를 겪었다.

 논란의 영화는 또 있다. 지난 4월 픽션뱅크에서 만든 「노랑머리」라는 영화는 영화심의 파문으로 인해 오히려 성공했다고 할 만큼 「말썽」을 일으켰다. 미풍양속을 해치는 장면과 음란한 장면이 문제가 됐다. 이에 대해 영화제작사측은 우리나라 성인관객이면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영화라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영화제작사도 결국에는 1분 30여초나 되는 장면을 삭제 또는 재편집해야만 했다.

 올해 5월 영화진흥법이 새로 제정되기 전까지만 해도 많은 영화인들이 제도권의 유연성에 높은 관심을 보여왔다. 현실의 무대뿐 아니라 표현의 한계를 바라다볼 마당이 생길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법제정 시기가 다가오면서 이같은 희망의 빛은 실망의 빛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의원입법으로 추진된 완전등급제를 전제로 한 등급심의제가 사전심의와 다를 바 없는 옛 공진협의 심의 형태로 변질돼버린 것이다. 등급외 전용관 설치 논의는 시기상조라며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이같은 저간의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정권이 바뀌고 여야의 시대적 상황논리가 바뀐 요인이 가장 크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표현의 자유를 완전히 보장할 수 없는 체제의 한계와 이 「명제」의 이중성이 표현의 마당을 가로막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영화 「노랑머리」에 대해 예술을 가장한 상업주의 영화의 전형이라고 서슴지 않는 것도 표현의 자유란 명제의 그늘진 이중성이다. 일부에서는 이 영화를 예술로 포장해 놓은 아주 잘 만들어진 「옐로 무비」라고 단언하기까지 한다. 더 나아가 「거짓말」이라는 영화에 대해서는 「음란물」이라는 비난의 화살이 멈추지 않는다. 리얼리즘을 강조한 영화라고 하지만 이는 예쁜 옷을 입혀놓은 허식일 뿐 선정적이고 사회 미풍양속을 파괴하는 「저급 영화」일 뿐이라고 평한다. 그래서 공공성과 윤리성을 무시한 이들 저급 영화를 위해 당연히 걸러지는 장치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쪽에서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하는데 반대편에서는 제도권에 장치보장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노랑머리」와 「거짓말」 같은 영화가 완전등급제에 의해 관객들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란한 외설을 감추고 예술로 위장하더라도 이는 이 사회의 건강함으로 걸러져야 한다고 믿는다. 한때 정부의 역할 가운데 공공성 유지와 사회기강 확립이란 게 들어 있었다. 그러나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할 수 있다면 그게 좋다.

 미국의 진보적인 예술가들은 정부의 한 조직인 문화부의 존재조차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소설가 빌 카우프만은 『예술활동에 대한 정부의 보조금은 결국 예술을 국가의 통제하에 두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정부의 예술문화에 대한 역할과 기능은 되도록 최소화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생각이다.

 다행히 정부가 올 정기국회 통과를 목표로 등급외 전용관 허용 등을 골자로 한 영화진흥법 개정안을 마련했다는 소식이다. 조변석개의 정책이라는 비난이 일지라도 책임지겠다는 정부의 때늦은 방침에 환영의 박수를 보낸다.

 이젠 성숙된 관객에게 맡길 때도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