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라인> 마케팅과 오픈 프라이스

윤원창 생활전자부장

 일반적으로 가전업계 종사자들을 두고 「계절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가전업계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파는 제품이나 판촉방법이 달라진다.

 실제로 이사철과 가을 혼수시즌이 겹치는 10월 상달에 들어서자마자 가전업계는 이사와 혼수를 겨냥한 다양한 판촉전략을 내세워 시장공략에 나섰다. 또 가장 큰 골칫거리였던 가전제품에 대한 특별소비세 폐지시기를 당초보다 1∼2개월 정도 앞당긴다는 정부 발표가 나오자 가전업계는 곧바로 수요위축을 우려해 아예 특소세 폐지에 따른 하락폭만큼 미리 인하해 판매한다는 메리트를 제시하며 고객 끌어들이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달 중순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회사마다 겨울 난방용품을 시장에 내놓으며 시장선점을 노리고 있다. 이것만으로 끝난 게 아니다. 월말이 되자 이제는 내달로 바짝 다가온 대입수능시험과 김장철에 맞는 판촉활동을 벌이고 있다. 한마디로 가전업체들은 계절과 상황변화에 따라 제품판매와 연계시킬 수 있는 갖가지 아이디어를 짜내 판촉에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가전업계 종사자들은 스스로를 「계절의 변화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전제품 판매에 영향을 미치는 큰 상황변화에도 가전업계가 이를 이용한 판촉활동을 전혀 하지 않은 게 있다. 바로 지난달부터 실시된 오픈 프라이스(Open Price)제도다. 이유는 무엇일까.

 오픈 프라이스 제도란 최종 판매업자가 가격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픈 프라이스 제도 도입은 「제조와 유통의 분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제조업체는 오로지 제조만 하고 판매를 비롯한 마케팅은 유통업체가 전담하는 유통구조를 지닌 미국 등 선진국에서 일반화된 제도라는 것만 봐도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우리나라도 유통업체가 독자적으로 마케팅을 해오기도 했다. 지금까지 유통업체가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벌여온 판촉활동의 무기는 제조업체가 정해준 권장소비자가격에서 얼마 할인해 판매한다는 「할인율」이었다. 하지만 오픈 프라이스 제도 실시와 함께 제조업체의 권장소비자가격 표시제가 폐지됐다. 또 할인을 암시하는 일체의 표시행위가 금지되고 소매업자가 판매하고자 하는 가격을 표기해 표시가격대로만 판매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숫자를 위주로 한 판촉활동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사정이 이런 만큼 제조업체나 유통업체 모두가 오픈 프라이스 제도를 마케팅에 활용할 방안이 없는 것이다. 오픈 프라이스 제도가 시행된 지 2개월 가까이 되지만 홍보가 되지 않으니 이를 모르는 소비자들이 많은 것도 당연하다. 그렇다고 유통업체간 가격경쟁이나 그에 따른 가격인하도 없다. 소비자를 위해 마련된 오픈 프라이스 제도가 두달째 표류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가전업체들이 브랜드 관리의 필요성과 정찰가격 유지만이 대리점의 적정마진을 통한 수익성 확보에 기여한다는 논리를 전개하며 영업사원들을 통해 가격지도를 강화하고 있는 데도 원인이 있다. 지도 가격대로 판매하지 않는 대리점에 대해 유무형의 압력을 가하는 사례를 보면 이 제도의 정착은 요원하다는 생각이다.

 특히 백화점은 직판, 대리점은 선택적 유통경로를 택하는 현재의 유통구조로 볼 때 이 제도가 오히려 제조업체간 또는 제조·유통업체간 담합을 촉발할 우려도 배제할 수 없다. 부담스러운 가격경쟁을 피하기 위해 제조업체들이 상호 담합을 통해 납품가격을 제한하거나 유통업체들과 연대해 판매가격을 통제할 수도 있는 까닭이다.

 이런 마당에 유통업체간 가격경쟁을 촉진시켜 가격의 획일화를 막는 한편 투명한 가격정보를 제공, 소비자의 선택폭을 넓히자는 오픈 프라이스 제도가 정착되기를 바라는 게 무리일지 모른다. 하지만 완전 개방되고 오픈 프라이스 제도가 도입된 유통시장에서 우리 업체가 살고 소비자가 이익을 보는 바람직한 마케팅 방안이 무엇인지 제조업체들은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며칠전 가전업체의 입찰·가격담합 등에 대해 시정조치를 내린 것처럼 정부도 공정경쟁의 풍토나 관행은 무시한 채 어느날 갑자기 무거운 과징금을 부과해 이 제도를 정착시키려 한다면 더 큰 부작용이 나올 수 있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정부-제조업체-유통업체가 트라이앵글을 구축, 오픈 프라이스 제도의 정착방안을 찾아야 할 때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