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라인> 대만의 추격

조휘섭 국제부장

 라면과 생활 전자제품 등에서 과거에 통용됐던, 「미국이 개발하면 일본이 상품화하고, 한국이 가격을 앞세워 일본 업체를 추격한다」는 공식은 이제 옛말이 됐다.

 이미 십수년 전부터 가전을 비롯한 생활용품 분야에서 저가시장의 주도권을 중국이 장악, 한국업체들이 자의 반 타의 반 고급 제품으로 이행해나가지 않을 수 없게 하더니 이제는 대만이 반도체나 액정표시장치(LCD) 등 첨단 분야에서 우리를 무섭게 몰아붙이고 있다.

 우선 메모리 반도체와 관련해 지난달 중순 대만 업체들이 무더기로 미국 상무부에서 8∼35%의 높은 반덤핑 관세율 판정을 받은 것은 역설적으로 대만 반도체업체들이 위협적으로 성장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지난 97년 4억2700만달러(통관 기준)이던 미국의 대만 D램 수입액은 지난해에는 7억달러에 육박할 정도로 급증했다.

 재미있는 것은 메모리 반도체에서 미국의 반덤핑 제재를 받은 국가들은 거의 예외없이 제재기간에 세계시장 점유율을 크게 높여왔다는 사실이다.

 80년대 미국의 반덤핑 관세부과 압력에 밀려 「반도체무역에 관한 협정(SCTA)」을 체결했던 일본이 미국의 압박이 진행되는 기간 동안 대부분의 미국 업체를 퇴출시키며 D램 시장을 장악했고, 이어 80년대말부터 본격적으로 D램 시장에 진출해 저돌적인 투자로 일본업체들을 몰아세우던 한국업체들도 미국으로부터 고율의 반덤핑관세율을 부과받은 이후 역시 D램 가격 상승 등에 힘입어 이익과 시장점유율을 모두 확대하는 아이러니가 반복됐다.

 「미국의 반덤핑 제재=점유율 상승」이란 법칙(?)은 2000년 벽두 대만 업체들에도 되풀이될 것 같은 느낌이다. TSMC가 올초 6억4000만달러 수준으로 예상했던 설비투자 금액을 최근 2배 수준인 13억7700만달러로 높여잡은 데 이어 내년에도 20억달러를 투자한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WSMC도 최근 일본 후지쯔로부터 0.20 및 0.22미크론 첨단 공정기술을 도입하기로 하는 등 대만업체들의 D램 등 메모리 생산시설 확대와 신기술 도입 열기가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메모리 반도체의 뒤를 잇는 고부가, 수출주도 산업으로 주목받고 있는 LCD 산업의 경우도 양상은 크게 다르지 않다.

 대만의 주요 6개사 가운데 5개사가 최근 라인증설에 일제히 착수했는데 대체적으로 증설 규모가 현재의 1.5∼2배나 되는 대규모인데다 증설 투자가 효력을 갖기 시작하는 시기가 내년 가을에서부터 2001년 초에 걸쳐 집중돼 있다. 2001년 초는 시장분석 전문가들이 대체로 공급초과 현상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는 시점이란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일본 업체들도 적지 않은 증산투자를 진행중이거나 계획하고 있지만 대체로 노트북컴퓨터용보다는 액정TV·DVD플레이어용 등 디지털가전용으로 발길을 돌리려는 움직임을 느낄 수 있다. 컴퓨터용 분야에서는 이미 강국으로 입지를 다진 한국이나 무섭게 떠오르고 있는 대만과의 경쟁을 피하면서 아직 기술력에서 앞서는 디지털가전에 자원을 집중, 체면과 실리를 챙기겠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이와 달리 대만은 노트북컴퓨터용에 치중해 이 분야에서 앞서는 한국을 따라잡아 2위 생산국으로 부상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내비치고 있다. 대만 주요 5사의 생산능력은 이번 증설투자가 완료되는 2001년 봄에는 현재의 2배 이상으로 늘어나게 돼 치열한 가격전쟁을 예고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인 디스플레이리서치사는 대만의 세계 TFT LCD 시장 점유율은 올해 3%에 불과하지만 지속적인 시설투자로 내년에는 13%, 2001년에는 24%로 뛰어오르고 2003년에는 31%에 달해 일본에 이어 세계 2위에 올라설 것이라며 대만의(한국에 대한) 우세승을 점치고 있다.

 그러나 국내업체들의 구조조정기를 틈탄 대만의 메모리 반도체와 LCD 분야에 대한 대대적인 추격의 결과를 점치기는 아직 이르다. 시장이라는 유기체를 제쳐놓더라도 국내 업체들이라고 이같은 상황을 팔짱끼고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한가지 바라는 것은 우리가 과거 일본과의 경쟁을 통해 체득한 「자본·기술 집약적인 산업일수록 투자드라이브를 이끌어가는 쪽이 시장의 주도권을 쥐게 될 확률이 높다」는 경험을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