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라인> 표준 혹은, 유연성의 문제

서현진 기획취재부장

 전자와 정보기기의 속성 가운데 그 중심에 있는 것이 호환성이다. 기술이 발달하고 복잡해질수록 호환성의 역할은 커진다고 한다. 이 말 속에는 기업들이 신기술 개발에 투자하는 노력 이상으로 호환성 확보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뜻도 담겨 있다. 기술 호환성을 높이기 위해 정하는 것이 표준이다.

 누가 표준을 주도하느냐에 따라 시장상황이 바뀌는 것은 당연하다. 표준에는 「법률상의(De jure)」 표준과 「사실상의(De facto)」 표준 두 가지가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법률상의 표준은 정부기관이나 무슨무슨 위원회가 규정하는 것으로, 대부분 법적 구속력을 갖는다. 소비자 보호효과까지 거두는 통신기기 형식승인제도 같은 것 등이 대표적인 예다. 개방형시스템상호접속모델(OSI)이나 멀티미디어압축표준(MPEG)과 같은 기술규격 역시 마찬가지다.

 반면 사실상의 표준은 시장원리에 의해 자연스럽게 완성되는 표준이다. 업계표준이란 말도 같은 뜻이다. 이를 두고 빌 게이츠는 『시장이 표준을 발견한다(Standards the market discovers)』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에 따르면 이제까지 성공한 표준은 모두 시장이 발견한 것이었다.

 시장에서 사실상의 표준이 정착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 사례로는 70년대 말 그 유명한 JVC의 VHS방식과 소니의 베타맥스방식간 비디오테이프 표준싸움이 있다. 소비자들은 제품설명서에 기술적 우수성을 잔뜩 적어놓은 베타방식보다는 그렇지 않은 VHS를 택했다. VHS는 기술에서는 뒤졌지만 베타보다 3배나 긴 3시간을 녹화할 수 있었다. 소비자들은 무엇보다도 축구경기나 영화 한편을 녹화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이 적어도 1시간 이상이라는 데 제품의 선택포인트를 뒀던 것이다. 이 사례는 현재도 시장(소비자)의 요구를 상품에 정확하게 반영할 줄 아는 지혜의 승리로 평가되기도 한다.

 사실상의 표준이 시장의 힘(자생력)을 바탕으로 법률상의 표준을 이겨낸 사례도 많다. 그 가운데 하나가 우리나라 컴퓨터 한글코드에 관한 것이다. 87년 정부는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시장에서 아주 널리 사용되던 조합형을 마다하고 완성형을 표준코드로 정했다. 무엇보다도 사용자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고 시스템 개발자 역시 기술적 신념을 굽히지 않고 조합형 방식을 고수했다. 정부는 결국 95년 조합형을 새로운 표준으로 추가함으로써 사실상 표준과의 싸움에서 패배를 인정하고 말았다.

 반대로 법률상의 표준이 사실상의 표준을 이겨낸 경우도 있다. 소프트웨어분야에서 사실상의 표준을 주도해온 마이크로소프트를 독점으로 몬 미국연방법원(DOJ)의 최근 판결이 그 예다. DOJ의 시각은 표준보다는 독과점의 문제이긴 하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시장이 발견한 표준을 정면으로 거부한 셈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런 사례가 최근 미국에서 부쩍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법률상의 표준은 과거 권위주의시대 우리나라 과학기술정책의 중심기조였다. 선진국과의 격차를 단기간에 줄인다는 명분을 내세워 정부기관이 표준을 정하면 민간기업과 소비자는 연쇄적으로 그것을 따라가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런 법률상의 표준은 성공한 것도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은 당국자나 정책입안자가 바뀌면 그것으로 생명력을 잃고 마는 것들이었다.

 이쯤 되면 우리는 당연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모순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까 사실상의 표준의 천국인 미국에서는 그것이 법률상의 표준에 의해, 그리고 법률상의 표준의 천국인 한국에서는 그것이 사실상의 표준에 의해 각각 제압되려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명쾌하게 해답이 나오는 논리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동전 앞뒷면의 성질처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없는 문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 있다. 이런 경향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는 순전히 우리의 몫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