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원창 생활전자부장 wcyoon@etnews.co.kr
찰스 로버트 다윈은 그의 저서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에서 자연계에는 격렬한 생존경쟁이 벌어지고 있고 이 경쟁에서 생존하는 것이 가장 유리한 변이를 가지는 개체라고 했다. 또 이같은 변이의 자연도태가 계속됨으로써 종의 변화가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름을 따 다위니즘이라 불리는 이 진화요인론은 한마디로 생물계가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의 방법으로 진화한다는 것이다. 이런 다위니즘의 근간은 경쟁에 있다. 경쟁은 자본주의 시스템을 움직이는 핵심요소다. 국가·기업 등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주요 축은 물론 돈벌이와는 크게 상관없는 학생들, 심지어는 종교단체까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 이론을 두고 영국의 산업자본주의 발전을 반영했다는 분석이나 자유경쟁에 의한 번영의 이념을 생물계에 도입한 것으로 간주한 일부의 주장들이 이를 잘 뒷받침해준다. 특히 다윈의 진화요인론이 발표됐던 19세기 중엽 유럽 강대국들은 산업혁명을 기폭제로 한 자본주의 경제를 성숙시켜 터질 듯 부푼 국력이 밖으로 뻗치는 과정에 있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은 당시 자유방임적 경제운용과 식민지 정책을 폈고 이때 다위니즘은 이같은 정책의 명분과 당위성을 제공하는 훌륭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세계화와 함께 국경을 가리지 않고 전개되고 있는 요즘의 경제상황 속에서도 이같은 강자의 논리가 지배하는 다위니즘의 속성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 적지 않다. 힘없는 개발도상국들에는 자유무역과 시장의 완전개방을 요구하면서 선진국들은 틈만 생기면 개도국을 상대로 불공정무역이라며 세계무역기구(WTO) 등에 제소하거나 엄격한 보호무역 조치를 취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엊그제 결렬된 WTO 시애틀 각료회담도 마찬가지다. 「21세기 통상장전」을 마련한다는 이번 각료회담이 결렬된 것은 새 천년에 새 무역질서를 기대했던 세계 각국에 실망을 안겨준 충격적 사건이며 자유무역의 앞날을 어둡게 하는 불행한 일이다.
이번 각료회의 결렬은 너무도 많은 의제를 짧은 기간에 소화시키려는 과욕에서 빚어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이보다도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밀어붙이기식 협상자세와 이런 미국의 독주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유럽연합(EU)과 일본, 개도국 등의 강력한 반발이 더 큰 결렬 배경이라는 후문이다.
특히 이번 회담기간 미국이 협상력을 발휘하기보다는 자기중심적 이익에 매달려 전체적 협상을 그르친 측면이 강하다는 우리측 당국자의 분석이나 반덤핑분야의 의제설정을 주장했던 우리나라에 미국이 강력하게 압력을 행사했다는 것은 미국의 다위니즘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세계무역의 새 교범이 될 뉴라운드협상 출범을 위한 시애틀 각료회담의 결렬은 분명 우리에게 또 다시 힘의 논리에 억눌릴 수밖에 없는 부담을 주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연합으로부터 새로운 통상압력 또는 추가적인 반덤핑 공세를 받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미국이 걸핏하면 슈퍼301조 발동위협을 벌여왔고, 얼마전 주한미상의(AMCHAM)가 내정간섭적 요구 같은 통상압력을 가해온 것을 감안하면 이같은 우려는 현실감을 더해준다.
그러나 과연 약육강식 형식의 진화요인론이 만능일 수 있을까. 이번 시애틀 각료회담의 결렬은 한편으로 20세기를 주도했던 미국의 다위니즘이 역사적 전환기를 맞아 더이상 존재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유럽연합과 일본, 우리나라를 비롯한 개도국들이 비록 각국의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것일지언정 공존공영하는 목소리를 낼 경우 강자의 논리보다 우세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만큼 그릇된 힘의 논리나 지배보다 합리적 사고에 뿌리를 둔 상생(相生)의 진화가 바람직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시애틀 협상 결렬을 계기로 불어닥칠 통상압력에 따른 후속 대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하는 우리나라로서는 이제 상생의 진화론에 바탕을 두고 정부 부처간 협조체제 강화는 물론 관련단체간 긴밀한 협력을 해야 할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