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라인> 겉 속이 다른 "엽전共助"

원철린 산업전자부장 crwon@etnews.co.kr

 한 외신잡지는 세계적인 영화사인 월트디즈니가 미래의 TV를 연구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프로젝트의 암호명은 「텔레퓨전」. 「텔레비전」과 융합이라는 뜻을 가진 「퓨전」의 합성어로 컴퓨터와 TV의 만남을 잘 설명하고 있다. 현재 이 프로젝트는 캘리포니아주 버뱅크에 있는 디즈니의 이매지니어링본부에서 구체화하고 있는데 이곳 실험실에는 융합TV를 시청하기 위한 각종 장치들로 꽉 차 있다고 한다.

 이 장치들은 TV광고에서 연속극의 결혼식 장면까지 모든 화면을 인쇄할 수 있고 특정 프로의 한 부분을 불러낼 수 있다. 영화대본 구입과 관련 웹사이트 연결도 가능하도록 꾸며져 있다. 디즈니의 아이스너 회장이 『혁명은 이미 시작됐다』고 선언할 정도로 새로운 TV의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현재 수요정체를 겪고 있는 디스플레이산업이 제2의 부흥기를 맞이할 것으로 봐도 과장된 일이 아니다. 최근 전문시장조사기관인 IDC는 2002년쯤이면 평판디스플레이시장이 98년의 1.7배인 260억달러를 넘어설 것이라는 희망섞인 전망치를 내놓기도 했다.

 이렇다보니 디스플레이업체들은 새롭게 열리는 이 시장을 잡기 위해 무척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다. 이미 시장형성에 성공한 박막트랜지스터 액정표시장치(TFT LCD)업체에 이어 플라즈마디스플레이패널(PDP)업체들이 생산설비를 확대하거나 신규투자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삼성전관과 LG전자가 최소한 2억달러를 투자, 연 30만장을 생산할 수 있는 생산라인 1기를 갖출 것이라는 후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같은 투자방식이 과연 디지털시대에서도 적합한 것일까라는 점이다. 자칫 투자가 잘못될 경우 기업생존에 타격을 입을 것으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흔히 디지털로 바뀌면서 생산양식도 바뀌었다고 이야기한다. 이미 일본은 21세기 전략보고서에 고속성장을 지탱해온 대량생산형 경제사회 규범이 종언됐다고 적고 있다.

 그래서 모든 기업들이 디지털시대의 생존전략으로 「협력」을 들고 있는 것이다. 혼자서는 급변하는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윈-윈 전략」이라고 불리는 기업간 제휴가 늘어나고 있는 점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상식을 뒤엎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면서 심지어는 「적과의 동침」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실제로 월 1만대의 PDP를 생산하는 후지쯔는 지난 4월 히타치와 PDP사업을 통합, 새로운 법인을 설립하기도 했다. 우리업체들보다 기술·자금면에서 한발 앞선 이 두 회사가 무엇이 아쉬워서 손을 잡았을까. 물론 초기시장의 위험부담을 줄이기 위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2등은 살아남기 어려운 약육강식의 디지털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적이지만 서로 손을 잡은 것이다.

 현재 PDP사업에 몸담고 있는 삼성과 LG의 실무자들은 기술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면 서로 터놓고 이야기하고 있다고 한다. 특허문제로 들어가면 긴밀한 협력이 더 잘 이뤄진다. 일본업체의 견제에 대응해야 한다는 목적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그러나 정작 본게임에 들어가면 이런 관계가 뒤틀려진다. 외국업체들과는 쉽게 제휴하면서도 국내업체끼리 경쟁하는 「우물안 개구리」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언제 봤느냐는 식으로 서로 헐뜯기 시작한다.

 이제는 이같은 사고를 바꿔야 할 때다. 삼성과 LG도 아날로그시절의 경쟁관계를 접을 필요가 있다. 불확실한 미래의 위험을 줄이면서도 초기시장에서 일본업체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두 회사가 공동으로 투자하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

 외교가에서는 흔히 「적의 적은 친구」라든지,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라는 말들이 자연스럽게 통용되고 있다. 삼성과 LG는 서로 국내에서 적이 될 수 있지만 세계시장에서는 친구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하루가 급변하는 네트워크 세상에 아날로그적인 사고방식을 되풀이해서 시장을 잃는 우를 더이상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