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라인> 해는 저무는데…

박재성 정보통신부장 jspark@etnews.co.kr

 집권 2년 동안 김대중 대통령의 경제정책 기조는 자유시장 원리였다. 대외적으로는 개방을, 대내적으로는 구조조정을 통한 경쟁력 강화가 골자다. 재벌은 사상 초유의 환란(IMF사태)을 초래한 주범 가운데 하나로 지목됐다.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수술대에 올려진 것은 당연한 수순. 반도체나 자동차·조선 등의 업체들이 환자 리스트에 올려졌다. 과잉·중복투자라는 환부는 빅딜이라는 이름으로 서서히 도려내졌다. 김 대통령은 자율을 표방했지만 기실 적극적인 개입과 조정, 지시로 일관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정보통신업계가 좌불안석인 것은 당연했다. 작은 땅덩어리에서 이동전화 5개사가 경쟁을 벌이고 있으니 중복투자라는 빌미를 잡힐 만했다. 구조조정 대상에서 비껴나 있는 것조차 이번 정권의 「시혜」로 비쳤다. 혹시라도 불똥이 튈까봐 구조조정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금기로 여길 정도였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SK텔레콤이 신세기통신을 인수하면서 자연스럽게 구조조정이라는 말이 나왔다. 업계 자율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등장한 것이 좀 다른 점이다.

 묵시적인 합의가 이처럼 깨지자 정보통신업계는 온통 벌집을 쑤셔놓은 것 같다. 한국통신프리텔이나 LG텔레콤, 한솔PCS 등 PCS 3사 사장은 SK텔레콤이 신세기통신을 인수하는 것은 얼토당토 않은 일이라며 주무부처인 정통부는 물론 국회·공정거래위원회로 뛰어다니고 있다. 이번 사안은 지배적 사업자의 독과점이며, 정통부가 인수를 승인하는 것은 특혜라는 주장이다.

 SK는 신세기를 인수함으로써 이동전화 가입자의 57%를 확보했다. 이미 이 시장은 성숙기에 달했다. 그래서 가입자 구도는 앞으로도 크게 변화하기 어렵다. 그러니 PCS사업자들은 천부당 만부당하다고 하지만 사실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게 그네들의 속내일 것이다.

 이같은 정보통신업계의 갈등에는 정부의 책임이 작지 않다. 정부는 당초 셀룰러분야에서 SK텔레콤과 경쟁하기 위해 신세기통신에 사업을 허가했다. 그랬다가 이제 와서 경쟁상대를 SK텔레콤이 인수하도록 놔둔다면 정책 실패를 자인하는 꼴이 된다.

 정부는 그 후에도 한국통신프리텔이나 LG텔레콤·한솔PCS를 이동전화(PCS)사업자로 또 허가해 버렸다. 셀룰러가 PCS와 사실상 차이가 없어진 상황이고 보면 정부의 이동전화 서비스 정책은 「단견」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SK텔레콤 측의 『5사가 경쟁하는데 신세기통신만 경쟁자일 수 있느냐』는 말도 틀리지 않다. 정부는 PCS사업자들의 항의에 대해 「일반적인 기업 인수」로, 또 「자율적인 구조조정」으로 봐달라며 공식적인 입장 표명은 자제하고 있는 모양이다.

 외국의 경우도 사업자들의 인수 및 합병(M&A)은 지난 96년 이래 지금까지 붐을 이루고 있다. 그렇지만 독점에 대해서는 엄격히 다스리고 있다. 미국은 연방법원이 자생적으로 영향력이 커진 마이크로소프트(MS)에 「독점으로 문제 있다」는 혐의를 보내고 있다.

 SK의 신세기 인수가 독점인지 아닌지에 대한 정부의 입장정리는 미적거릴 일이 아니다.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한 점은 이번 사안을 국내 정보통신산업의 체질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구조조정의 본질은 경쟁력 향상이다.

 기업인수가 단순히 몸집을 키우는 데 그친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구조조정이라고 할 수 없다. 독점 여부의 판정도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국가 경제 차원에서 발전적인 구조조정으로 이끌어내는 것은 더욱 어렵고 중요한 일이다. 정부의 고충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젠 지구촌은 시장 개방에 따라 선진 기업들이 M&A를 통해 제3세계로 밀고 들어가고 있다. 왕성한 식욕으로 정보통신기업을 집어삼키고 있는 미국의 AT&T는 공룡과도 같다. 이동전화업체인 일본 NTT도코모는 가입자가 2400만명에 달해 우리나라 이동전화사업자 전체 가입자(2200만명)보다 많다.

 우리의 어느 업체도 현재로선 이들과 경쟁 상대가 못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우리의 정보통신업체들이 하루빨리 이들과 맞설 만한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다. 태풍이 몰려오고 있는데 집안싸움이나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작지 않은 숙제를 남긴 채 1900년대는 저물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