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 대기업의 벤처투자

이윤재 기술산업부장 yjlee@etnews.co.kr

 지난 27일 삼성그룹을 대표하는 삼성물산과 삼성전자는 같은 목소리를 담은 계획을 발표해 관심을 모았다. 이날 지주회사로의 변신을 선언한 삼성물산은 앞으로 5년후에는 100여개의 벤처투자회사를 보유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삼성전자는 올해부터 매년 500억원씩 3년간 1500억원을 벤처기업에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또 삼성뿐만 아니라 현대·SK·LG 등도 주력 계열사를 통해 대규모 벤처투자를 계획하고 있다.

 대기업들의 이같은 벤처투자 움직임은 특히 올들어서 가시화되고 있는데 이제 벤처기업 투자에 성역이 따로 없는 듯한 분위기다. 그리고 현 정부의 벤처육성 의지를 대기업들이 적극 뒷받침한다는 명분도 충분해 보인다. 벤처대국을 건설하는 데 돈 많은 대기업까지 가세한다면, 그 시기를 훨씬 단축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믿음직한 벤처국가로 탈바꿈할 수 있다는 희망섞인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디지털 경쟁시대의 생존전략이 근간을 이루고 있음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대기업들은 한 중소 벤처기업의 시가총액이 하위권이긴 하지만 10대 그룹에 속하는 몇개 대기업 그룹을 합한 것보다 많은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지금은 아무리 잘 나가도 언제 조그만 벤처기업에 밀려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대기업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는 굵직굵직한 대기업들이 미래 핵심사업 분야에 전략적으로 집중 투자하는 방식을 택해 왔지만, 이것만으로는 더이상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게 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디지털 경쟁환경 아래서는 벤처 네트워크가 필수적이라는 게 요즘의 대기업 분위기다.

 대기업의 벤처투자는 그래서 몇가지 색다른 속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단순한 투자수익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는 점에서 벤처캐피털과 성격을 달리한다. 투자수익을 얻어 다시 벤처기업에 재투자하는 과정을 통해 벤처기반을 넓혀 나가는 벤처캐피털과는 달리, 대기업의 벤처투자는 현재 사업의 성장한계에 대비하는 포석의 의미가 강하다.

 기존 산업이 사양화되고 새로운 비즈니스가 속출하는 디지털 경쟁환경에서 여기저기에 씨앗을 뿌려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사업아이템을 계속 늘리고 사업부서를 확대하는 것 등은, 그렇지 않아도 비대해진 몸집을 더 가누기 어려워지게 한다는 한계를 대기업들은 잘 알고 있다.

 둘째, 대기업의 벤처투자는 벤처기업의 시장진입과 성장을 다른 벤처기업보다 더 빠르게 할 수 있다. 삼성전자와 같은 대기업은 풍부한 자금과 더불어 국내외에 광범위한 네트워크망을 갖추고 있어 이제 갓 태어난 벤처기업을 일정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벤처기업이 어디로부터 투자지원을 받느냐에 따라 어렵지 않게 시장우위를 점할 수 있는, 벤처기업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예견된다.

 그리고 중장기적으로는 대기업이 벤처기업을 계열사로 거느리는 새로운 형태의 그룹계열화 현상을 배제할 수 없다. 대기업의 벤처투자는 아직 확연하게 드러나 있지 않지만 앞으로 특정 분야에서 1등으로 떠오를 수 있는 아이디어에 대한 포석이라는 점에서 더욱 적극성을 띨 것이 분명하다.

 이는 벤처기업에 대한 지분확대를 수반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벤처계열사를 늘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이 경우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불러온 주역 중 하나로 꼽히는 대기업 그룹 중심의 국내 산업(기업)구조가 그 모양새만 벤처계열로 바뀌는 셈이 된다. 물론 디지털 경쟁시대에는 경영방식이 그룹총수의 의지 하나로 사업이 결정되는 「상의하달식」 형태를 크게 벗어나겠지만 벤처기업의 창의성이나 신속성은 상대적으로 무뎌질 수밖에 없다.

 이제 벤처기업을 국가경제의 기반으로 삼아 IMF를 탈출하고 디지털 경쟁시대에 대비하려는 범국가적 차원의 신선한 의도가 대기업의 벤처투자로 자칫 퇴색되는 결과를 빚지 않도록 모두가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