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 오부치 총리의 "영어공용화"

지난달 28일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는 국회 본회의에서 시정연설을 했다. 이날 연설은 새 천년 첫 연설이라는 점에서 일본 국민으로부터 큰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이었다.

 오부치 총리는 올해 국정을 「교육개혁」과 「과학기술창조」에 초점을 맞춰 추진하기로 했다. 그는 특히 교육개혁을 통해 젊은이들이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고 인터넷을 통해 국제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이날 오부치 총리의 이러한 발표는 각 언론들로 하여금 「영어공용화」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대부분의 언론은 「영어를 제2의 공용어로 하는 국민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의견을 제시했다. 영어의 정복을 통해 「글로벌 리터러시(Global Literacy)」를 확립해야 한다는 게 주요 언론의 담론이다.

 오부치 총리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지 않다. 그의 별명은 둔우다. 둔한 소라는 뜻이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그를 「식은 피자」라고 혹평했다. 총리로서 자격이 없다고 폄하했다.

 뛰어난 구석도, 뚜렷한 정견도 없는 보수정치인이라는 게 뉴욕타임스의 평가다. 이러한 평가를 받고 있는 오부치 총리는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영어를 제2공용어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의 성향에 비춰보면 상당히 획기적인 일이다.

 일본에서 영어공용론은 오부치 총리 이전부터 거론됐다. 아사히신문의 국제문제 대기자인 후니바시 요이치 편집위원은 언론 기고문을 통해 처음으로 영어를 제2공용어로 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의 영어구사력 때문에 일본이 침몰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일본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세계적인 여론형성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영어를 공용어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사실 일본인의 영어수준은 수준 이하다. 지난 98년을 기준으로 일본의 토플 성적을 평가하면 세계 221개국 중 205위로 최하위권에 머물렀다. 북한과 비슷한 수준이다. 10명 중 4명이 대학에 진학하는 경제대국 치고는 치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 총리 자문기구는 바로 이러한 점을 우려해 영어의 공용어화를 총리에게 권고했다.

 이 기구는 일본이 21세기에 번영하기 위해서는 세계 공용어가 된 영어에 적응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영어를 제2공용어로 할 수 없다면 제2의 실용어 지위라도 부여해, 정부기관과 국회의 각종 간행물을 영어와 일어로 동시에 발간하라고 총리에게 권유했다.

 현재로는 그 실현가능성을 속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영어공론화에 대해 공감하는 의견이 예상외로 많다는 점에선 눈여겨볼 만하다.

 영어가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영어는 이제 과학·기술언어이자 인터넷언어다. 세계의 중요한 지적 산물의 80% 이상이 영어로 이루어져 있고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90% 이상이 영어로 돼있다.

 인터넷이 커뮤니케이션의 중요한 수단이 되는 상황에서 영어는 세계 공통어임에는 틀림없다.

 세계를 하나로 연결하는 인터넷 영어는 이제 특정 국가의 언어라기보다는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도구인 「국제어」라는 것이다.

 그럼 우리나라의 실정은 어떤가. 지난해 11월 정을병 한국소설가협회장이 영어를 제2공용어로 지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으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외세의 잦은 침입과 식민지 경험이 형성해 놓은 민족주의, 그리고 유교의 유산인 보수주의에 젖어 있는 우리로선 영어를 제2의 공용어로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세계 열강에 국어를 빼앗겨본 우리로선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는 것이 우리 정신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는 일부 전문가들의 의견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인터넷어로서 국제공용어가 되어 가고 있는 영어를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런 점에서 일본 오부치 총리의 영어공용화 추진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금기현 컴퓨터산업부장 khkum@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