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극장의 시대를 연 프로테이프산업이 비로소 자리매김한 것은 88 서울 올림픽이 끝나고 2∼3년이 지난 90년대 초반쯤으로 기억된다. 골목 길 모퉁이에서나 겨우 찾아 볼 수 있던 비디오 대여점들이 봄순 돋듯 생겨나기 시작하더니 어느 새 동네마다 꽉 들어서 자리를 차지했다. 그 덕에 할리우드 영화를 보기 위해 굳이 극장을 찾지 않아도 됐고 우리영화 관람을 위해 충무로와 명동거리를 온종일 헤매지 않아도 됐다. 놓치고 싶지 않은 TV프로와 스포츠는 녹화를 통해 볼 수 있었다.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컬러TV가 방영되면서 흑백TV가 사라지고 VHS테이프를 구현할 수 있는 VCR가 급속히 보급된 결과였다.
어찌됐던 이같은 문화적 수용 환경 변화는 산업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당시 끄덕하면 지면에 오르내리던 우리나라 컬러TV에 대한 미국의 덤핑 기사는 자리를 감추었고 세트업계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는다. 부품업계도 이른바 백색가전의 선봉이랄 수 있는 컬러TV와 VCR 보급에 따른 대체 수요로 활황기에 진입한다. 오늘날 200억∼300억달러에 이르는 수출 선봉의 반도체산업이 이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면 비약일까.
문화와 산업은 동전 양면과 같이 떨어질 수 없는 상관 관계를 맺고 있다. 문화가 번성하면 산업이 웅비의 나래를 펴고 반대로 문화가 퇴보하면 산업은 사양길에 접어들 수밖에 없다. 요즘 시쳇말로 산업은 문화와 끊임없는 관계를 맺으며 움직이는 것이다. 그래서 패러다임을 읽지 못하면 결국 도태되고 만다고 하지 않던가.
한때 VCR를 대체할 만한 상품이라고 하여 장안의 화제를 뿌린 제품은 다름 아닌 레이저디스크플레이어(LDP)였다. 이 제품은 화질뿐만 아니라 음질에 있어서도 가히 VCR를 능가했다. 그러나 이 제품을 선보인 업체는 역부족을 실감해야만 했다. 소프트웨어 업체에서 수익성이 낮다며 수수방관한 채 전혀 떠받쳐주질 않았던 것이다. 결국 당시 어마어마한 개발비를 들여 만든 이 제품은 얼마 가지 못한 채 시장에서 사장되고 말았다.
LDP에 대한 수요 인프라를 구축하지 못하면서 하드웨어업계와 소프트웨어업계는 함께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한쪽은 대체 수요기에 접어든 VCR의 후속모델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했고 장수할 줄만 알았던 프로테이프업계는 디지털 열풍으로 존폐의 귀로에 서고 말았다. 때를 놓침으로써 문화계와 산업계가 함께 몸살을 앓은 것이다.
최근 고품질의 영상과 음향을 즐길 수 있는 새로운 매체가 급부상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미국, 일본 등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는 디지털다기능디스크(DVD)가 바로 그것이다. 이 제품은 VCR에 비해 수평해상도가 무려 2배에 달하고 음질은 돌비 서라운드를 지원한다. 음악 CD와 비디오 CD와의 호환이 가능하고 영화 한편을 6㎝의 CD크기에 담을 수 있어 보관도 용이하다. 기능과 품질로 비교하면 VCR와 상대가 되질 않는다는 것이다. 관련업계에서는 이에 따라 VCR를 대체할 가장 강력한 영상매체로 이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업계는 올해 당장 20만대 이상은 보급할 수 있을 것으로 들떠 있다. 관건은 소프트웨어를 포함한 수요 인프라 구축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의 보급을 둘러싸고 하드웨어업계와 소프트업계의 불협화음이 심상찮게 들려온다. 한쪽에서는 상대적으로 고부가 가치가 높은 소프트웨어업계가 예산을 확보, 수요 부양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덩치 큰 하드웨어업체에서 먼저 시장기반을 닦아 주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는 것이다.
언필칭 LDP보급의 실패를 되풀이해서는 안된다. 작금의 상황은 하드웨어업계와 소프트웨어업계가 한몸으로 맞부딪쳐야 할 시점이다. 소프트웨어만으로 어렵고 하드웨어만 가지고서는 신규매체에 대한 소비자의 불안감을 덜어줄 수 없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논하기에 앞서 백지장도 마주보며 든다는 마음 자세가 필요하다. 그같은 까닭은 새로운 수요창출을 통해 또 다른 비약을 준비해야 하는 우리산업계와 관련업계의 운명이 너무도 절박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