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 디지털시대 CEO像

이윤재 디지털경제부장 yjlee@etnews.co.kr

최근 현대경제연구원은 「디지털형 CEO」의 자격을 체크할 수 있는 흥미로운 자가진단표를 내놓았다. 20개 문항으로 이루어진 이 자가진단표에선 「기업의 매출이익률을 얼마나 높였나」하는 아주 기초적인 경영자의 자질에서부터 「e메일을 얼마나 자주 보내나」 「스타크래프트나 DDR를 할 수 있나」 「스스럼없이 대화할 수 있는 저명인사의 수는 몇 명인가」 「신간서적을 얼마나 자주 접하나」 등 디지털시대에 CEO로서 갖춰야 할 소양을 다각적으로 묻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도 「디지털시대, 새로운 CEO의 조건」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이 보고서에선 새로운 CEO의 조건으로 먼저 끊임없는 아이디어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책을 인터넷이라는 디지털 매체를 통해 판매하려는 생각을 먼저 해낸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 PC사용자 대부분이 일부의 기능만을 자주 이용한다는 데 착안해 휴대형 PC인 팜 파일럿을 개발한 스리콤의 에릭 베나우도 등이 여기에 속한다. 베조스는 직원들과 휴식시간에 빗자루를 스틱삼아 하키 게임을 하는 괴짜로 「익숙한 것으로부터의 탈출」에 익숙한 인물이다.

두번째로는 「스피드」를 꼽는다. 변화에 신속하게 대처하는 능력을 갖춘 CEO만이 사업기회를 선점할 수 있다는 얘기다. 또 CEO는 아이디어가 어떻게 사업으로 연결돼 높은 수익을 창출할 수 있을지 투자자 등에 설득력있게 제시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지금도 실리콘밸리의 사업설명회에선 프레젠테이션에 따라 수천만달러에 달하는 자금조달의 성패가 결정되기도 한다.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과실을 공유할 수 있는 「파트너십」 능력도 디지털시대 CEO로서 대단히 중요하다. 전략적 제휴의 경우 전통적 기업에선 선택으로 그칠 수 있지만 디지털시대의 경쟁환경에서는 생존과 직결된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파트너십의 중요성을 가늠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보고서는 「집중력」을 강조한다. CEO가 과거와 현재의 성과에 안주하지 않고 고객을 향해 집중할 수 있어야 시장지배력을 갖는 상품개발과 출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따로 정해놓은 근무시간이 있는 게 아니라 문제해결을 위해 쏟아붓는 시간이 곧 CEO의 근무시간이며, 이러한 분위기는 임직원들에게도 파급돼 실리콘밸리나 서울벤처밸리(테헤란)의 밤이 불빛으로 환하게 비춰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디지털시대의 CEO상은 산업시대의 경영자와 차별되는 부분이 적지않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지 않은 기업환경에서는 새로운 CEO로서의 자질을 갖춘 경영자라 하더라도 모래속에 묻혀 있어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벤처기업 CEO를 디지털시대의 새로운 CEO상으로 모델화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지금, 대기업 경영자 중에선 디지털을 이해하고 인터넷을 생활화하는 데 열정을 쏟고 있는 사람이 많다. 인터넷 기업을 운영하는 젊은 CEO들과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대기업 경영자들도 늘고 있다. 출근하자마자 가장 먼저 e메일을 체크하고 e메일로 업무보고를 받는 경영자를 이제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사회적으로도 50대 사장이 직원들과 DDR를 즐긴다고 해서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들이 디지털시대의 CEO상으로 벤처인에게 밀리는 이유는 뭘까.

앞서 지적한 대로,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지 않은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디지털시대의 CEO는 말그대로 최고경영자로서 경영에만 충실해야 한다.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라면 소유권도 과감히 포기할 수 있어야 디지털시대의 CEO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하지만 소유권과 경영권을 같은 선상에 놓고 있는 기업인들이 아직도 대다수다. 우리나라 4대그룹의 하나인 LG그룹이 LG전자와 LG정보통신의 합병과 관련해 『대주주의 경영책임을 강화하기 위해 LG전자 주식을 매집한다』는 논리가 계속되는 한 디지털시대에 새로운 CEO가 대거 쏟아져나오기는 힘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