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거인들의 전쟁

박주용 국제부장 jypark@etnews.co.kr

영국 이동통신 사업자 보다폰의 미국과 독일의 같은 사업자 에어터치와 만네스만 인수, 미국의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 AOL의 미디어 그룹 타임워너 합병, 스페인 인터넷 서비스사업자 테라네트웍스의 인터넷 포털 업체 라이코스 인수, 미국 장거리전화업체 AT&T의 케이블 TV사업자 미디어원 인수, 미국 지역전화 사업자 월드컴의 장거리전화사업자 MCI와 스프린트 인수, 홍콩 인터넷 서비스사업자 PCCW의 홍콩텔레컴 인수.

지난해부터 확산되고 있는 세계 정보통신 업체들간의 인수합병 가운데 주목할 만한 사례들이다. 거론된 업체들 외에도 크고 작은 인수합병이 적지 않지만 이들만으로도 세계 IT 시장의 흐름을 읽기에는 충분하다. 지역과 업종의 벽이 허물고 세계를 상대로 사업을 전개하는 거인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추세라면 무선통신과 유선통신 통신, 인터넷 서비스사업 및 콘텐츠사업까지 포함하는 IT분야 토털 서비스를 전세계를 상대로 실시하는 초거인의 등장도 멀지 않았다.

이들이 인수 합병을 통해 사업 영역확대와 몸집 불리기에 나서는 이유는 간단하다. 각종 사업의 고유 영역과 지역의 파괴라는 변화를 끌어내고 있는 인터넷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다. 외견상으로는 대국이 소국들의 흡수해 더욱 강해져가고 있는 중국의 전국시대를 보는 듯하다. 그러나 강자가 약자를 힘으로 흡수하는 것과는 달리 서로의 이해관계를 감안한 발전적인 통합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는 다소 다르다.

지금까지의 인수 합병 움직임만으로도 미국과 유럽 등 주요지역의 패권을 거머쥘 업체들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유럽지역의 경우 이동통신 부문에서 보다폰, 인터넷 서비스 부문에서 테라네트웍스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으며 미국에서는 전화사업 부문에 MCI월드컴, 인터넷 및 콘텐츠 부문에 AOL이 강자로 부상했다. 또 아시아 지역에서는 홍콩텔레컴을 인수한 PCCW의 위세가 만만치 않다.

그렇다면 국내 상황은 어떤가. 통신서비스 사업자들간의 합병이 일부 진행되고 있기는 하지만 IMT2000 사업권 획득을 목표로 하는 국내용일 뿐이다. 변화하고 있는 국제적인 추세, 강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현실에 순응하려는 움직임을 보기는 어렵다. 시각을 대형 통신사업자들에서 한 단계 낮춰 벤처기업 특히 인터넷 기업들을 대하면 더욱 무력하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인터넷 기업들은 아직도 자기 목소리를 내기에 여념이 없다. 문제는 이들 기업 가운데 대다수가 자생력을 갖기 힘들다는데 있다.

인터넷 분야에서 우리는 아시아 존에서 가장 앞서가는 나라로 평가된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모래알로서 강한 모양새에 불과하다. 우리의 인터넷 산업이 장기적으로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경쟁력 있는 대형 업체의 등장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국내에도 IT분야 거인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인터넷과 기존 통신서비스를 통합한 초대형 업체가 나타난다면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하다.

지금 국내 인터넷 업체들에 필요한 것은 합병을 염두에 둔 구조재편이다. 합종이나 연횡처럼 전략적 제휴는 한계가 있다. 작은 업체들이 합치고 이들이 다시 합치는 것을 반복해 자가 발전할 수 있는 유기적인 조직이 만들어져야 한다. 또 이 유기적인 조직이 다시 영역을 뛰어넘는 통합으로 이어질 때 최소한 아시아지역에서라도 경쟁력 있는 거인들이 만들어질 수 있다.

기업을 매각하는 것은 결코 사업에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이제 우리에게 요구된다. 특히 기술에서 가능성을 인정받을 기업가일수록 더욱 그렇다. 앞으로 기업을 하는 이들은 자신이 만든 기술이나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한계가 어디인가를 심각하게 분석해야 한다. 기술이나 실력만으로 야후나 마이크로소프트같은 거인으로 성장할 수 없다면 거인의 팔이나 다리 등 몸의 일부로 거듭나는 것도 자신이 만든 기업이나 기술을 더욱 살아남게 하는 방안이 될 것이다.

이제는 기업이나 기술, 그 자체로 상품이 될 수 있다는 보다 발전적인 의식이 필요한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