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 벤처기업 자금난

이윤재 디지털경제부장 yjlee@etnews.co.kr>

미국 동부에는 서부의 실리콘밸리와 성격이 비슷한 실리콘앨리가 있다. 뉴욕의 첨단산업 중심지인 이곳 실리콘앨리에는 7000여 벤처기업이 몰려있는데 기업과 소비자간(B2C) 전자상거래 업체와 콘텐츠 개발업체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지금 이곳 벤처기업들은 자금난으로 도산하거나 도산하지 않기 위해 허리띠를 바싹 조이고 있다고 한다. 지난 4월 나스닥 폭락후 상대적으로 주가 하락폭이 큰 이들 업체에 대한 투자가 격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비단 실리콘앨리만이 아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지역 닷컴업체들에 대한 투자자들의 발길이 뜸해지면서 새로운 비즈니스를 향한 사업확장보다는 감량경영을 선택하는 벤처기업이 늘어나고 있다. 이 모두가 미래가치를 담보 삼아 끌어들인 돈이 고갈 직전에 있거나 더 이상 돈을 끌어들이기가 어렵게 된데 따른 것이다. 또 벤처기업의 속성상 내실 다지기에 전념하다가 비즈니스 기회를 상실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상황이 이쯤 되고 보니 벤처기업을 바라보는 시각도 전과는 사뭇 다른 것 같다. 특히 벤처열풍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던 기존 기업들은 이제서야 벤처거품이 걷히는 게 아니냐는 반응과 함께, 한편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 그리고 벤처기업들이 그동안 돈잔치에 안주했다는 혹평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벤처의 위축은 곧 국가경제의 후퇴라는 지적이 만만치 않게 제기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벤처육성 또는 활성화를 통해 IMF라는 위기를 반전시킬 정도로 적지 않은 의미를 갖고 있다.

그동안 우리경제는 벤처 활성화에 힘입어 사업기회의 확대, 고용확대 등 직접적인 효과를 거두었으며 경영방식 및 경영구조에 새로운 획을 긋고 있다. 그중에서도 종업원의 주주화는 벤처가 몰고 온 대표적인 변혁임에 틀림없다. 월급쟁이라는 틀속에서 다분히 피동적으로 일하던 근로자들이 회사의 주인이라는 주주 종업원으로 탈바꿈하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는 풍토가 나타났다. 이러한 벤처기업에는 법정 근무일수라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종업원들이 주어진 시간에 주어진 일에만 충실히 하는 기업과는 근본적으로 경쟁력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은 벤처기업이 살얼음판으로 한걸음 다가서고 있다. 돈(유동성) 때문이다. 벤처 활성화의 원동력도 돈이었다. 풍부한 자금이 벤처기업으로 유입되면서 경제의 활력을 찾았듯이 벤처투자가 시들해지면 경제 전반에도 먹구름을 드리울 수밖에 없다. 이는 또 1차적으로 벤처기업 스스로가 헤쳐나가야 할 과제기도 하다.

종전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상당수의 벤처기업들은 기업공개(IPO)를 통해 자금을 확보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심지어 IPO가 최종 목표인 것처럼 여기에 매달리는 벤처기업이 적지 않다. 그러나 벤처를 바라보는 투자자들의 시선이 예전같지도 않거니와 실익도 크게 줄어들었다. 벤처 또는 닷컴 거품론에 휘말리면서 코스닥지수가 올 들어 반년동안 40% 이상 떨어졌다는 사실을 단순히 주식시장 환경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이제 벤처기업들은 IPO에서 과감히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벤처는 말그대로 벤처다운 비즈니스 자세와 아이디어가 요구된다. 그중에서도 벤처답게 인수합병(M&A) 시장에 과감히 몸을 던질 수 있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벤처기업이 또 다시 돈에 연연하다가는 그 기업의 미래는 물론이고 전반적인 산업의 앞날이 어둡기 때문이다. 일례로 한 벤처기업이 자금력이 풍부한 기업에 지분을 매각해 경영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주식을 챙긴다면 그 경영자는 회사도 살리고, 자신도 또 다른 벤처비즈니스를 펼침으로써 벤처기업은 계속 활기를 띠고 확대될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아직 M&A에 대한 인식이 낮고 법·제도적으로도 미흡해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지만, 지금 벤처의 본산지인 실리콘밸리를 필두로 M&A가 열풍에 가까울 정도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