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기다릴줄 아는 지혜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곳곳에서는 죽겠다고 아우성이며 만나는 사람마다 『이러다간 올해를 넘기기 힘들다』고 하소연이다. 주식시장에서는 연일 주가가 폭락, 개미들의 넋을 빼놓고 있으며 설상가상으로 9월 대란설, 10월 위기설 등 밑도 끝도 없는 괴담이 횡행하고 있다.

닷컴기업으로 대표되는 벤처들이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굴뚝의 대반격」이 시작됐다는 반론도 있지만 최근 한국의 벤처기업과 인터넷 기업을 둘러싼 시장환경은 최악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추락하는 이들에겐 날개도 브레이크도 없는 것 같다.

불과 1년여 만에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한해 전만 해도 온나라가 벤처, 인터넷 열풍에 휩싸였었다. 인터넷을 모르면 원시인이라는 소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고 아무리 거대한 오프라인 업체라도 인터넷과 연계된 온라인 비즈니스를 갖고 있지 않으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다.

밀레니엄 패러다임이 어쩌고 디지털 경영이 저쩌고 하면서 온 국민이 벤처, 인터넷 칭송에 침이 말랐고 개미들은 장롱속에 고이 간직했던 비상금을 들고 나와 너도 나도 벤처, 닷컴기업에 투자하기 바빴다.

일부에서 과열, 과속 경고음을 내보냈지만 한번 탄력이 붙은 벤처 열기, 인터넷 붐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고 졸지에 수천억원의 돈방석에 앉게 된 벤처사업가, 닷컴기업 대표들은 우리의 우상이요 희망으로 떠올랐다.

그러던 것이 언제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수익 모델」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면서 벤처 거품, 인터넷 만능주의에 급브레이크가 걸렸다. 미국에서 건너온 「수익 모델」이라는 것은 요컨대 벤처나 닷컴기업이 당장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였고 결국 돈을 벌지 못하는 기업엔 「미래가 없다」는 냉혹한 시장의 목소리였다.

최근 들어 벤처기업인들을 접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귀사의 수익 모델은 무엇입니까』라는 말을 유행처럼 던진다고 한다. 사업 시작 1∼2년 만에 주가상승에 의한 뜻하지 않은 자본 이득을 취한 기업가들로서는 대답이 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닷컴기업, 벤처기업이란 게 본시 1∼2년 만에 대박을 터뜨릴 수는 없는 것이기에 더욱 궁지에 몰렸다.

이제는 수익 모델이 분명치 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한민국의 벤처와 닷컴기업들이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돈 줄이 꽉 막히고 직원들은 오프라인기업으로 U턴하고 있다. 급한 김에 인력 감축이니 적자사업 철수니 하는 오프라인식 구조조정에 나서고 있지만 뾰족한 해법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도 알고 우리도 안다.

거품은 빼야 한다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옥석은 가려야 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벤처, 닷컴기업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각이 좀 더 「여유로와야 한다」는 것과 기업들도 진정한 벤처, 닷컴기업으로 거듭나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 지금까지의 벤처, 닷컴 열풍은 인위적인 정부의 정책 의지 개입과 머니 게임 성격이 다분했다. 기업의 내재 가치 및 성장성에 의한 평가가 아니라 투기적 투자가 견인차 역할을 했고 이를 부추긴 것은 정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처, 닷컴기업이 단기간에 이룩한 성가는 무시해선 안될 만한 무게를 갖는다. IMF 이후 우리 경제의 재도약을 이끌고 경기 활성화의 기폭제가 된 것도 이들이며 고용 창출을 통한 인력시장 유연화도 이들이 선도했다.

특히 지난 수십년간 지속됐던 아날로그형 한국 경제의 틀을 디지털로 뒤바꿔 놓은 점은 역사적 사건에 해당한다. 벤처, 닷컴기업의 고속질주는 새로운 천년 한국 경제의 패러다임이 무엇인가를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던 셈이다.

벤처, 닷컴기업에 당장의 수익 모델이라는 잣대를 들이댈 경우 살아남을 곳이 하나도 없다. 지금은 적자 투성이에 투자만 계속되지만 한번 성공하면 세계적 히트상품, 히트기업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는 잠재적 가능성이 갖고 있는 회사들이다.

머니 게임이 아니라 이들의 가능성을 정확히 진단하고 평가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들고 일단 판단이 선 투자자라면 여유를 갖고 기다릴 줄 아는 지혜가 요구되는 기업들이다.

살을 빼겠다고 무리한 다이어트를 시도하다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의 벤처, 닷컴기업들도 마찬가지다. 거품을 제거한답시고 모조리 죽여버리면 21세기 디지털 경제의 활력은 누가 담당하는가. 보병이 피로하면 잠시 쉬거나 보충병력을 투입해 다시 싸워야 하는 것이 전투의 제1수칙이다.

그간 자본 이득에 도취돼 졸부 행세를 했던 벤처, 닷컴기업들은 우선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투자자들은 현재 닷컴기업들이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과정을 겪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 주길 바란다. 닷컴기업들은 좁은 한국시장에 안주했던 「co.kr」가 아니라 세계를 상대로 경쟁하는 진정한 「.com」기업으로 거듭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