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벤처기업가는 캐피털리스트가 돼서는 안된다

원철린 산업전자부장

시중에 떠돌고 있는 벤처기업의 위기론에 정부가 정면 대응에 나서고 있다. 재정경제부는 이례적으로 「벤처산업위기론 근거있나」라는 자료를 내고 위기론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처음 밝히기도 했다.

코스닥지수가 현재 연초의 절반수준으로 떨어졌으나 벤처산업발전을 재는 다른 통계치들은 크게 우려할 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게 재경부의 공식적인 입장이다.

올들어 월평균 벤처기업지정이 지난해보다 평균 약 80% 늘었으며 현재의 수세대로 가면 금년중에 1만개의 벤처지정이 기대될 정도다. 지난 6월말 현재 벤처캐피털의 투자재원이 4조1286억원으로 지난해 2조7918억원보다 48%나 증가했다. 벤처기업에 투자한 창투사도 50개사에 이르러 전년동기(26개사)에 비해 2배 가량 늘어났다. 이러한 지표를 보면 시중에 나돌고 있는 벤처기업의 위기론은 타당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재경부의 발표를 기점으로 다른 정부 부처에서도 벤처기업의 위기론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다각적인 대책을 쏟아 내고 있다.

정보통신부 장관은 지난달 31일 닷컴벤처기업가들과 만찬을 하면서 정부의 대책을 내놓고 위축된 닷컴경영자들의 기를 살려주기도 했다.

정부의 이같은 노력은 벤처기업의 위기론을 이대로 방치해 놓았다가는 진짜로 우리 경제가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부의 이같은 대응이 때늦은 감이 없지 않나 싶다.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열기가 식은 후에 터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사후약방문」격으로 업체들의 요구보다 한발 뒤늦었지만 어느 정도 위축된 시장분위기를 바꾸어 놓기에는 충분하다.

정부의 노력으로 벤처기업의 위기론이 수그러진다고 해서 진정 벤처기업의 위기는 없을 것인가.

우리는 IMF시절에도 경험한 적이 있다. 위기가 온다는 경고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늘 똑같은 소리를 틀었다. 정부관계자들은 경제의 기초가 튼튼하기 때문에 위기는 없을 것이라고 강변하기 일쑤였다.

정부의 말과는 달리 동남아에서 시작된 금융위기는 우리에게도 찾아 왔다.

진정으로 위기에 대처하려는 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상황도 마찬가지다.

벤처기업 위기론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벤처거품론의 바람이 불면서 나스닥이 폭락한 결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번 위기론의 근원은 벤처기업 내부에 있었다. 우리 벤처기업가들이 하나같이 유상증자를 통해 막대한 자금을 확보하면서 본업을 제쳐두고 벤처기업을 발굴·투자하는 캐피털리스트로 변신한 점이다.

바깥에서 볼 때 벤처기업가들이 기업경영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재테크에 나선 것으로 보였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인 재벌들의 문어발식 경영을 그대로 흉내낸 것으로 비쳤다. 이 점이 벤처기업의 위기론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실제로 코스닥에 등록한 벤처기업들은 하나같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벤처기업가들은 본업에 투자하기보다는 축적된 부로 벤처투자에 열을 올렸다.

반도체 장비·재료업체들은 벤처캐피털을 설립하거나 투자조합을 꾸려 벤처 인큐베이팅 및 투자활동에 나섰다. 미래산업은 1000억원을 투자해 「미래인터넷기업백화점」을 설립, 인터넷 벤처 인큐베이팅 역할을 맡고 있다. 신성이엔지·한양이엔지·삼우이엠씨·화인반도체기술·디아이·한택·아주엑심 등 10여개 반도체 설비·장비·재료업체들은 납입자본금 140억원 규모의 벤처캐피털인 「에이스벤처캐피털」를 설립했다. 케이씨텍·한택·연우엔지니어링은 한국통신과 공동으로 컨소시엄을 구성, 한국IT벤처투자를 만들었으며 실리콘테크도 최근 관련 업체 및 투자사들과 함께 「윈윈 벤처캐피털」이라는 투자사를 설립하고 활동에 들어갔다.

영세한 규모인 ASIC업체들도 십시일반으로 돈을 투자해 벤처투자회사를 설립했다. 하나같이 벤처캐피털리스트로 변신한 것이다.

지난 7월말경 일본을 방문하는 길에 가나가와 사이언스파크에 입주해 있는 벤처기업 소쇼테크의 오쿠노 사장을 만났다.

소쇼테크는 LCD패널을 검사하는 장비를 개발해 지난해 2억4000만엔의 매출을 올린 아주 전형적인 기술벤처기업이다. 이 회사의 오쿠노 사장은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주식공개를 통한 벤처붐이 일어나고 있다』면서 『회사를 설립한 지 만 10년째인 내년에 기업을 공개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오쿠노 사장은 덧붙여 『기업공개로 자금을 조달해 반도체분야로 나아갈 계획』이라고 3개년 중장기 비전을 털어 놓았다.

오쿠노 사장의 말은 우리와는 아주 정반대다. 이처럼 한 우물을 파는 일본 장비벤처기업과 캐피털리스트로 변신한 우리 장비업체와의 경쟁에서 누가 이길 것인가. 결과는 이미 드러나 있다.

따라서 이제 우리 벤처기업가들도 위기론의 책임을 외부로 돌리기보다는 스스로 책임을 질 자세를 가져야 한다. 본업에 충실하기보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벤처캐피털리스트로 변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봐야 할 때다. 그렇지 않으면 벤처기업의 위기론은 또다시 재발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