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라인> 디지털 상봉

정복남 부국장대우 정보통신부장

눈물 바다는 끝났다. 6.15 정상회담의 첫 결실로 이루어진 남북 이산가족들이 55년 만에 서울과 평양에서 서로 만나 얼굴을 부비는 장면은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가슴에 감격과 흥분을 남겨 놓고 일단 막을 내렸다.

속도의 시대, 디지털시대에 우리가 잊은 줄만 알았던 「피붙이」라는 단어가 되살아 났고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체감한 순간들이었다. 어느 북측 방문자의 말처럼 이번 이산가족 상봉은 셰익스피어가 살아온들 만들어 낼 수 없는 거대한 감동의 드라마였다.

그러나 들떠있다고 해결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만남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 소중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분단체제라는 냉엄한 현실에 직면해 있다. 남북 이산가족이 얼싸 안고 눈물을 흘리던 바로 그 순간에도 납북자 가족, 국군 포로 가족들은 정부의 성의있는 대책을 촉구하며 피켓 시위에 한창이었다.

55년 만의 작지만 큰 걸음을 그렇게 내디뎠지만 시작은 이제부터다. 1000만명 가운데 이제 겨우 100명 남짓한 남북의 피붙이가 만났을 뿐이다. 더 만나야 한다. 상봉의 인원과 기회를 더욱 늘려야 한다. 특히 언제 생을 마감할지 모를 고령의 이산가족이 100만명이 넘는다는 통계이고 보면 이들이 살아 생전 그리운 가족의 안부나마 확인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민족의 명령」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8.15 이산가족 상봉이 마무리되면서 이같은 겨레의 염원을 반영,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와 생사확인, 서신교환을 최우선으로 추진하라고 관계부처에 지시했다고 한다. 통일부 장관 역시 앞으로 있을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이산가족의 상봉 규모와 기회를 확대하기 위한 면회소 설치에 총력을 기울이는 동시에 납북자, 국군 포로 송환문제 등을 적극 거론하겠다고 밝혔다.

당연한 일이다. 이번과 같은 행사는 말 그대로 남북 정부가 떨어진 가족을 만나게 하겠다는 이벤트에 불과하다. 3박4일간의 일정에 소요 경비가 30억원이라면 앞으로 이를 계속 감당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남은 것은 남북 이산가족 상봉에서도 고비용 저효율을 걷어 내고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일이다.

벌써부터 국내외 은행이나 경제연구소들은 남북통일 비용에 관한 보고서를 쏟아 내고 있다. 6000억달러에서 4조달러까지 예측도 다양하지만 한가지 재미있는 분석이 이번 이산가족 상봉과 함께 등장했다.

주로 미국기관들의 시각이긴 하지만 천문학적 통일비용이 당초 예상보다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다. 남과 북에는 1000만명의 이산가족이 있고 이들이 서로 왕래, 교류하는 패턴이 일상화될 경우 정부차원에서 조달해야할 비용이 크게 감소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양안(兩岸)의 가족들이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경제 흐름까지 주고 받는 중국과 대만의 사례처럼 남북 이산가족의 상호 방문과 교류가 이루어진다면 통일비용의 상당 부분을 자연스럽게 민간이 흡수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연구기관들이 주목하는 것은 그 이산가족 수가 남쪽에만 무려 1000만명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디지털 상봉을 유력한 대안으로 고려해 봄직도 하다. 남쪽은 디지털 인프라가 충분하다. 전국 곳곳에 광케이블이 거미줄처럼 깔려 있고 인터넷 사용자도 1000만명을 넘어 섰다. 북쪽의 인프라만 갖춰지고 북쪽 당국의 의지만 있다면 번거로운 절차와 시일을 소요할 필요없이 언제 어디서나 이산가족의 생사확인은 물론 간접 상봉도 가능하다.

다행히 남북간에는 서울에서 판문점을 경유, 평양을 잇는 광케이블이 최근 개통됐다. 북쪽 지역도 주요 대도시에는 광케이블이 매설되어 있다고 한다. 광케이블은 전화는 물론 음성, 영상 등 데이터통신이 가능한 인프라다.

남쪽은 이미 명절 때마다 해외 가족들과 전화 통화는 물론 영상 만남도 일상화됐다. 비록 대면(對面) 상봉은 아닐 지라도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소식을 주고 받는 것만으로도 그리움을 달랠 수 있는 최소한의 수단으로 자리잡고 있다.

남은 것은 북쪽 당국의 의지지만 비용이 적게 들고 간편하다는 점에서 마다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광케이블이 연결된 북쪽 주요 도시에 컴퓨터와 대형 TV모니터만 설치하면 남북한 전국 규모의 이산가족 디지털 상봉이 이루어질 수 있다.

먼저 얼굴을 보고 안부를 교환하자. 이제는 상봉도 준비된 만남이어야 한다. 3박4일간 부둥켜 안고 눈물만 흘릴 수는 없다. 직접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만나야 하고 사정이 여의치 않다면 안방에서 혹은 디지털상봉센터에서 간접 상봉이라도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영원히 얼음장 같을 것이라는 남북관계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이산가족 상봉에도 21세기 패러다임을 도입해볼 만하지 않은가.